“제가 처녀막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상심할지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면 계속 가슴이 아파옵니다. 남자분들, 궁금합니다. 처녀막이 있고 없고, 성경험이 있고 없고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전 제 자신이 밉고 답답해 죽겠습니다.”

사랑해서 성관계를 가졌던 남자와 헤어진 어떤 여성이 새로운 사랑을 만나면서 보내온 고민의 글이다. 순결과 처녀막에 대한 고민의 글은 남자도 여자도 보내오지만 그 내용이 확연히 다르다. 여자는 마치 금간 도자기처럼 자신의 불완전함, 때로는 비도덕적(?)인 자신을 비난하고 새로운 상대가 어떻게 자신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염려한다. 심지어 처녀막 재생수술까지 운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남자의 경우 자신이 동정을 잃었다며 한탄하고 비난하거나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상담은 한 번도 못 받아 보았다. 이런 상담글을 대하면서 차라리 세 번이나 처녀막이 재생된다는 두더지의 복(?)이 부러울 지경이다. 나의 마음과 상처를 돌보고 추스르기 전에 나를 사랑할 사람의 마음과 기대만을 염려하는 우리 젊은 여성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해부학적으로 말한다면 처녀막이란 ‘여성의 질구를 불완전하게 메우고 있는 결체조직’이며 ‘질막’이다. 이 처녀막은 사람마다 생김새와 두께가 다 달라서 어떤 사람은 가벼운 충격에도 쉽게 파열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성관계가 불가능할 만큼 두꺼운 경우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첫 성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피 한 방울 나지 않고 고통도 없어 처녀성을 의심받는 반면, 어떤 여성은 여러 번의 성관계 때마다 부분적으로 파열되어 계속 피가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통계에 따르면 첫 성관계에도 불구하고 처녀막의 파열로 인한 출혈이 안 보일 확률은 50%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사람에 따라 가벼운 충격, 예를 들어 태권도 발차기나 발레의 다리 찢는 동작, 승마 등에 의해 쉽게 파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처녀막은 처녀를 증명하는 기준이라기엔 너무 불완전하다. 일반적으로 모든 처녀에게 처녀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은 때어날 때부터 흔적만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따라서 순결함과 처녀막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처녀막과 순결을 동일시한다. 물론 순결이란 소중한 것이다. 가능하면 내가 원하는 그런 순간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몸과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을 것이다. 그것은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여자의 순결이 더 귀하고 남자의 순결은 덜한 것이 아니다. 또한 순결은 누가 누구에게 바치고 잃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이든 성이든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는 진정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젊은이들이 진정한 순결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길 바란다. 사랑했기에 누구와 성관계를 했다. 그것도 많은 고민과 갈등 끝에…. 그 사랑이 영원하리라 믿었고, 그래서 두 사람은 순결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이 헤어짐이 두 사람의 잘못일 수는 있어도 사랑했다고 믿은 마음이 거짓은 아니었을 터…. 단지 좀 아쉽다면, 좀더 자신의 성가치관과 태도를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그것들이 일치했더라면 하는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완전을 추구해 가는 존재다. 그래서 장난으로 성관계를 한 게 아니라면 비난할 이유도 비난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좀더 욕심을 낸다면 다음에는 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그때는 어떻게 만남의 모습이 달라지더라도 자신의 사랑을 컨트롤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일방적인 사랑은 ‘독’
상대만 있고 내가 없는 사랑을 피그말리온식 사랑이라고 한다. 고대 희랍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석고상을 사랑해 보상 없는 사랑을 하는 그를 불쌍히 여긴 여신이 석고상을 사람으로 변하게 해 피그말리온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신화의 끝은 해피엔딩이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보상받기 어렵다.

누군가는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지만 이것은 역설일 뿐이고, 그래도 우리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에서 만지고 쓰다듬고 안을 수 있는, 그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보이는 사랑을 해야 불행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보면 ‘상대만 있고 나는 없는’ 피그말리온식 사랑에 목을 매고 불행해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내 애인은 파란색을 좋아해. 그래서 나는 파란색만 입어.”라거나 “나는 성관계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이가 너무나 원하니까 거절하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아직도 내가 정말 원하는가에 대해 확신이 없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내가 없는 사랑을 하다보면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없어지는 아픈 경험을 하기 일쑤다. “내가 널 어떻게 대했는데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어!” “나보다 그를 더 사랑했는데 그는 나를 떠나버렸어요. 나는 더 살 희망이 없어요.”라며 눈물짓기도 한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런 불행한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다. 나를 귀하게 생각하고 스스로 대접하지 않는 사람을 누구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는 바로 나다. 그런 내가 하는 사랑이기에 더 소중하고 현명해야 하며 그에게 혹은 그녀에게 반드시 내가 존중되어야 한다.

사랑을 할 때는 분명히 내가 있고 상대도 있는 그런 사랑을 하자.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상대에게 알리고, 상대 또한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하면 더 행복하고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내가 원하는 사랑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으면 더 아름답고 성숙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태어나면서 체득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배워가는 것이다. 또 사랑이 일방적이면 행복하기 어렵다. 그런 사랑은 오래 가지도 않는다는 걸 늘 기억하자.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