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분은...
19살에 어머니는 저를 낳았습니다. 시골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누군가 찾아오지 않으면 만남이 쉽지 않은 충청도 시골에서만 살다가 일찾아 그곳까지 오셨던 아버님을 만나 결혼하게 되셨습니다. 결혼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어쩌면 답답한 시골 농부의 가정을 떠날수 있었던 유일한 탈출구였기에 어린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그리 오래지 않아 먹고사는 것 자체가 버거웠던 시절에 북에서 홀로 내려와 정착한 아버지 또한 결혼한 아내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겨웠을 때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2년뒤 여동생이 그리고 또 일년뒤 남동생이, 그리고 삼년뒤 여동생이 태어났습니다. 가난하고 추웠던 시절에 이런 4남매를 돌보는 것이 참 힘드셨을텐데 그것도 아직은 더 청춘을 누리고 젊음의 향기가 풍겨야할 때에 어머니의 품에는 벌써 4남매가 안겨 있었습니다. 막내를 포대기로 업고 어머니의 두손에는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씩을 잡고 있었고 저에게 줄 손이 없어 저는 어머니의 치마 끝자락을 붙잡고 다녔습니다. 손이 방문고리에 쩍쩍 들어붙는 추운 날씨에 여섯가족 빨래를 위해 얼음을 깨뜨리며 물을 길어 기저귀를 빨고 옷을 빨아 널었습니다. 학교에 갈 시간이 됐는데도 옷이 안말라 있으면 아궁이 곁에서 옷을 말리고 차가운 냉기 가득한 옷은 품에 넣어 조금이라도 녹여 입히시려고 애쓰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꽁치 한마리로 여섯 토막을 내서 한 조각씩 먹을 때도 물론 어머니 몫은 정말 누군가의 말대로 머리뿐이였습니다. 혈기 넘치는 아버지와의 부부싸움은 여느 가정처럼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부부싸움이 아니라 일방적인 아버지의 화풀이였기에 어머니는 이리저리 도망다니시느라 자식들 앞에서 다 쏟아내지 못하는 여인의 아픔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어떡하든 자식을 최고로 만들려고 그 와중에 저를 서울로 보내 어려운 유학생활의 뒷바라지를 하시며 곁에 두고 싶은 자식 떨어뜨려 놓고 그리움을 품고 사셨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어머니에게서 유일한 삶의 이유는 교회였고 신앙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의 핍박 속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던 외할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은 어머니는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삶의 유일한 안식처이고 꿈이고 즐거움이셨습니다. 의사를 꿈꾸던 제가 어느날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 말씀을 드리니까 어머니는 기뻐하시면서 주의 종 되는 사명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시며 함께 즐거워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성전에서 주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들이 목사가 된다는 것은 아들만의 몫이 아니라 내 몫이기도 하시다면서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뿐이 없으니 너는 목사의 길을 가고 나는 기도의 길을 가시겠다고 그렇게 성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런 어머니에게 신학 조금 배웠다고 대들기도 하고 어머니 신앙이 잘못됐다고 항변하기도 하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런 미련을 떨때 어머니는 아무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냥 교회로 가셔서 기도만 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난 40년을 무릎으로 걸어오셨습니다. 이제는 자녀의 돌봄이 필요해지신 연세인데 멀리 떨어져 아무것도 할수 없어 민망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드리면 지금도 어머니는 “그냥 목회만 잘하면 돼. 엄마가 바라는 것은 그것 뿐이야”라며 교회얘기, 신앙얘기만 하다가 끊으시곤 합니다. 미국에 사는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바라고 싶은 것도 있으실텐데 제가 부담될까봐 혹 제가 불편할까봐 말을 줄이시는 거죠.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러듯 저희 어머니도 제겐 그런 분입니다. 돌려드리기가 불가능한 이 사랑, 나 또한 자식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할텐데 그것조차 쉽지 않으니 탄식만 나옵니다. “ 아아~ 난
아버지라는 분은...
어찌된 사람인가~”
수년전 한국에 갔다가 고향집을 방문하고 부모님을 뵙고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제 머리맡에는 새 양말 하나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아침에 일찍 산책나가시면서 제게 갈아 신으라고 놔두신 것이었죠. 그걸 갈아 신으려다가 문득 요즘 생활이 많이 어려우실 때 양말 하나라도 더 갖고 계시는게 나으실 것 같다는 생각에 제가 전날 신고 온 양말 냄새 맡아보니까 아직 괜찮은 것 같아 다시 신은 후 아버님이 주신 양말을 책상아래 밀어두고 그냥 아침을 먹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인사드릴 때 아버님 말씀이 “주목사, 다시 만날 수 있으면 감사하겠지만 언제나 우리 헤어질 때 이게 마지막 일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 그렇게 되면 우리 천국에서 만나세”하는 말씀에 울컥하는 맘을 참고 두 분을 뒤로 하고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걸어 왔습니다. 근데 버스를 타려는데 대합실로 아버님이 급하게 뛰어 오시는 겁니다. 손에 뭔가를 들고는 “주목사, 잠깐만!” 그리고 그분이 내미는 것은 제가 아침에 갈아 신지 않은 새 양말이었습니다. “주목사 이거 갈아 신고 가야지” 저는 “이거 때문에 여기까지 뛰어 오셨어요? 아버님 두었다가 신으세요” 그래도 아버님은 “아냐, 주목사. 내가 줄 수 있는게 이것뿐인데 이거라도 신고 가” 저는 거절할 수 없는 아버님의 사랑에 대합실에서 양말을 갈아 신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아버님은 제 헌 양말을 주머니에 넣으시고는 제가 떠날 때까지 대합실을 떠나지 않으시면서 손을 흔들고 계셨습니다. 제가 갈아신은 양말은 마치 아버님이 제 두발을 품에 넣고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하는 느낌으로 저를 감싸 안았습니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