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의 말 한마디에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다. 김정은의 여동생이자, 북한의 권력 2인자로 부상하고 있는 김여정이 대북전단 봉쇄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남북관계 파탄까지 경고하고 나서자, 한국 정부는 마치 하명을 받들듯 ‘전단 살포 금지 법안을 제정하겠다’면서 김정은 남매의 진노를 무마하기 위해 분주하다. 김여정이 대북전단으로 발끈한지 4시간만에 일어난 일이다. 국격과 자존감 같은 것은 안중에도 두지 않은 모습이다.

소위 ‘삐라’라고 불리는 대북전단에는 김일성 일가의 독재와 세습을 비판하고, 주민들은 굶어죽지만 공산당은 배터지게 즐긴다고 비난하며, 발전되고 풍요로운 남한으로 넘어와서 자유를 즐기며 살아보자고 설득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전단지에 북한주민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초코파이나 1달러 지폐 혹은 남한방송을 들을 수있는 단파 라디오 등을 묶어서 파주 등 휴전선 부근에서 풍선에 매달아 날려보내고 있다. 삐라는 한국전쟁 때부터 사용되어 왔는데, 탈북자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들이 날려보낸 것은 40여년 정도 되어 보인다. 그런데 최근 주민들이 굶주림에 지쳐 체제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탈북자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북한은 남한에서 보낸 삐라가 주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북전단은 보수 정부에서도 딜레마였다.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 북한은 포천에서 탈북자 단체가 띄운 대북전단 풍선을 향해 고사총 10여 발을 발사했다. 주민들의 불안이 커지자 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해 전단 살포를 제지하고 탈북 단체를 만나 자제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반발한 탈북 단체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자 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도 “전단 살포는 표현의 자유 실현을 위한 것으로, 원칙적으론 제지할 수 없다”며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이처럼 남북 대화나 접경 지역 국민의 안전에 부담이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 문제는 어디까지나 한국 정부와 국민의 자율적 결정에 맡길 사안이다. 현 정부는 북한에 한없이 너그럽다. 그러니 세습 독재도, 무자비한 인권 탄압도, 우리 국민에 위협적인 핵·미사일 개발도 다 이해하려고 한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자 청와대가 "강한 유감"이라고 했다가 김여정이 "주제넘다"라고 한 소리 하자, 다음 도발 때부터 입을 다물었다. 지난달 북한이 고사총으로 남한측 GP를 명중시키고도 아무런 해명도 않자, 국방부는 알아서 "고의는 아닐 것"이라고 감싸고 돌았다.

또, 지난해 12월에는 북한이 화낼까봐 F35기 도입 기념 행사도 비공개로 했다. 2년전 일본의 그 행사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평창올림픽 때는 북한이 '남측 언론 보도'를 문제 삼자 현 정부는 "비판적 보도를 자제해달라"고도 했다. 지난해 말, 한국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에서 11년 만에 공동제안국에서 빠졌다. 북이 민감해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공동제안국에는 유럽연합 국가들과 일본, 미국, 캐나다 호주 등 60여개 회원국이 참여했다. 우리 축구 대표팀이 평양에서 무관중·폭력 경기를 겪었는데도 "북 나름의 공정한 조치"라며 편들었고, 비행기로 5시간이면 갈 거리를 66시간 동안 열차로 이동하는 김정은의 기이한 행동에 청와대는 "탁월한 판단과 선택, 역사에서의 사열"이라고 했다. 여당 중진들은 한국에서 했으면 아동 학대라고 했을 북한 집단 체조를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했고, "북한 주민은 부러움 없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통일부 장관 출신 인사는 "북한은 최고 존엄에 대한 도전을 묵과할 수 없다"면서 북한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북한이 우리 대통령을 겨냥해 '소대가리' '개'  '바보'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김정은에 대해서는 어떤 비난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니 현 정권이 북한의 추종자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김여정은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북한 대표단으로 서울에 왔다. 외국 정상이 와도 차관급이 영접하는 게 관례지만 한국 측에선 장차관급 3명이 몰려가 서른 살짜리 그녀를 맞았다. 2박 3일간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을 네 차례나 만났다. 그때마다 "대통령님"이라고 부르며 "평양에 꼭 오시라"고 했다. 세차례 진행됐던 남북 정상회담 장면에서 김여정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손수 잔일 처리를 하는 성실한 모습도 여러번 포착되었다. 청와대는 김여정이 문 대통령에게 공손히 술을 따르는 사진, 활짝 웃으며 영부인과 환담하는 사진 등을 공개하면서, 김여정을 예의 바른 공주님, 평화의 메신저인 것처럼 포장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은 북으로 돌아가는 김여정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눈인사를 나눴다. 그랬던 김여정이 지금 문 정부를 향해 독설을 퍼붓고 있다. "나는 못된 짓 하는 놈(탈북민)보다 못 본 척하는 놈이 더 밉더라"고 했다. 문 대통령을 겨냥해 '놈'이라고 한 것이다. 2년 전 님이 놈이 되었다. 지난 3월에도 겁먹은 개, 저능한 사고, 완벽한 바보라고 막말을 했다. 서울에서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앞으로도 남북 이벤트가 벌어질 때마다 그녀의 표정은 또다시 바뀔 것이다.

전단지를 빌미로 혹여 전쟁을 일으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접어두자. 종이 쪽지 때문에 일어날 전쟁이었다면 예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번에 북한은 전단지 살포 금지와 함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가동이라는 한결같은 레파토리도 얹혔다. 언제 또다시 막히고 폐쇄될 지 모르는 금강산과 개성공단에 대한 기대는 북한이 핵을 포기되는 날 가져야 함이 맞다. 지금은 미국과 전세계가 지향하는 비핵화를 위한 북한 제재노선에 적극 합류하는 것이 최선이다.

국가는 국가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이 있다. 국내에도 전단지 살포에 대한  시각차가 있다. 그렇다면 김여정의 말에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이전에 국내 여론부터 모아야 하는게 순서였다. 그런데 이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한국 정부는 김여정이 담화를 낸 지 4시간 만에 그를 위한 법을 만들겠다고 요동을 치니, 대북 저자세를 넘어‘굴종’이라 비판받아도 지나치지 않아 보인다. 불안정한 북한 내부 사정을 돌파하기 위한 남매의 관심끌기 전략에 흠칫할 필요는 없다. 이번처럼 즉각 반응한다면, 한국 정권 길들이기에 성공했다고 확신하는 김정은 남매의 요구는 계속이어질 것이다. 삐라 봉쇄 요구는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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