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한 번 정도 목사님들과 테니스를 치면서 운동도 하고 교제를 나누곤 합니다. 잘 치지는 못하지만 어울려 게임을 하다 보면 운동도 되고 스트레스도 사라지면서 다시 힘을 얻는 시간이 되어서 즐기면서 참여하고 있습니다. 게임은 둘이 한편이 되어 복식게임을 합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 게임을 하긴 하지만 많은 경우 실수도 하게 되고 저 때문에 게임에 질 때도 있습니다. 저의 실수로 점수를 내어줄 때 저의 파트너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마음이 좀 가라앉을 때면 저의 파트너가 제게 큰소리로 해주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Good Try!” 저의 실수를 나무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할 수도 있는데 제게 “Good Try”라고 해주면서 저의 실수를 감싸주곤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비록 네가 실수해서 점수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너의 시도는 정말 좋은 것이었다고 하며 미안할 수 있는 마음을 격려하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어가 주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합에 임하게 하는 그런 표현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운동을 하면서도 참 좋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도 사용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에 이민간 한 분의 경험을 글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민 초기에 자기 아이가 학교에 가서 영어 때문에 많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다는 겁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시험을 본 단어시험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선생님이 쓴 한 마디의 평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는 겁니다. 아이가 써낸 영어단어는 비슷하기는 하지만 모두 철자가 틀린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 시험지를 채점한 선생님은 0점이라고 쓰는 것 대신에 답안지 아래에 “Good Try”라고 써 보낸 것이었습니다. 빵점이란 말과 Good Try란 말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죠. 실수한 파트너에게 Good Try라고 해주는 말이나 단어가 다 틀려 0점이 맞지만 그래도 굉장히 노력하고 있고 조금 더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하며 Good Try 해주는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세상에서 실패하고 힘들어도 살만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오래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여선교회 회원들이 모여 주일에 먹을 김치와 깍두기를 담다가 큰 싸움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김치를 저릴 때 소금의 분량 가지고 나이 많은 분과 젊은 분이 의견을 달리하다가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깍두기 담을 무우를 써는데 크기가 크다 작다하며 깍두기 크기 때문에 또 싸우게 되어 교회가 큰 분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라고 교회가 흔들릴 정도로 싸웠을까 생각해 보면 각자의 경험과 주장이 제일 옳다고 생각하는 강한 자아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아니 오히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의 본질적인 죄성 때문입니다. 사단이 뱀의 모습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말은 이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게 되었고 이것이 인간의 죄의 뿌리가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끊임없이 서로의 옳음을 주장하며 분열하고 갈등하며 나눠지고 싸우면서 전쟁하고 죽이고 하는 일들로 가득차게 됩니다. 이념으로 나눠지고 인종으로 나눠지고 빈부로 나눠지고 지연과 학연으로 나눠집니다. 종교로 나눠지고 정치로 나눠집니다. 교회도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예수파, 기독파, 그리스도파, 목사파, 장로파, 오래된 박힌돌과 새로운 굴러온 돌로 나눠집니다.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고도 회의만 하면 싸우고 나눠진 의견으로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지는 일도 일어납니다. 사단은 이렇게 세상을 분열시켰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하나로 묶어 주십니다. 민족과 이념을 넘고 세대를 넘어 십자가 아래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성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피와 살의 은총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 옵니다. 이때 우리가 묵상하며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은혜는 우리가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모기 하나가 어떤 사람의 팔에 앉아 피를 빨아 먹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팔에 앉은 모기를 손바닥으로 때려잡으려고 할 때 모기가 외칩니다. “잠깐, 제발 저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제안에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잖아요”  모기를 죽이지 않을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가 있다면 동시에 빚진 자의 겸손함이 우리 안에 새겨져 있을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정죄와 판단과 비난보다는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죠, 감사합니다, 이해합니다. 사랑합니다.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크게 “Good Try”라고 외쳐주는 것이 하나님이 꿈꾸는 세상을 덮어갈 향기가 되지 않을까요. 이런 노래 아시죠? <영감 (왜 불러) 뒤 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마누라 (왜 그래요) 외양간 매어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죠) 어쨌나 (친정집 오라비 장가 들 밑천에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뭘 해도 당신이 했으면 다 잘한 겁니다. 다 괜찮은 겁니다.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따지려고 하지말고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Good Try”라고 외쳐 준다면 누군가는 그 소리에 힘을 낼 겁니다. 그리고 고마워 할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최고의 지혜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