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때 선서식의 진행자는 미국 시민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미국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항목을 뽐내듯이 큰 소리로 열거해준다. 그 후 우리는 독수리 여권을 들고 거리낌없이 세계 여행을 다녔고, 미국 시민으로서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 어디서도 미국인을 반기는 곳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코로나 최대 발생국으로 등극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미국인 입국을 제한 또는 금지시키고 있다. 이달 초 미국 정부는 전 세계 여행금지 조치를 전격 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해외여행은 여전히 어렵다. 미국 내 코로나 환자 급증으로 세계 각국이 미국인의 입국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인도, 중국, 이란 등 30여 개 국가는 미국에 여전히 4단계 여행금지를 적용하고 있으며, 영국 등 일부 유럽국가와 호주, 베트남, 필리핀도 미국에 대해 3단계 여행 재고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적대국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 미국인을 이렇게 홀대하는 경우는 없었다. 심지어 한국을 방문하는 경우에도 미국인은 특별 검역대상자로 취급된다. 요즘 같으면 한국 방문 시 미국에서 왔다는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렇다고 미국 내 관광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하와이나 알래스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자가격리가 요구되기 때문에 사실상 자국 영토에서도 이동의 자유는 제한적이라 볼 수 있다.


     아무도 미국인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도 낯뜨거운데, 올 상반기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이 역대 최다라는 소식은 미국의 추락하는 이미지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2020년 상반기 미국 시민권 포기자는 6천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2019년 한 해 동안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이 2천여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반년 만에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사람이 3배나 늘어난 셈이다. 이들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한 이유는 세금을 포함한 여러 제도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대처하는 방식이 꼽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코로나19에 대응해 보여준 모습은 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줘도 F학점을 넘기 어렵다. 무사안일 대응으로 발병 초 코로나19 대비 기회를 연거푸 날렸고 허위·과장, 부처 간 내분 등의 악수가 거듭되었다. 결국 전 세계 확진자의 4분의 1, 사망자의 5분의 1을 차지하는 최대 피해국이 됐다.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안일하고, 거짓말만 일삼고 있다. 마스크의 효능을 알면서도 고의로 무시한 그는‘스카프를 쓰는 것도 좋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 결과 바이러스 전파 예방에는 전혀 효과가 없는 얇디얇은 스카프만 불티나게 팔렸다. 그리고는 공식석상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타나 마스크의 효능을 몸소 조롱했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그제서야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들며, 마스크의 효능을 인정하는 제스추어를 넌지시 취했다. 그가 마스크의 중요성을 공식화한 것은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벌어진 지 6개월 만이었다. 마스크 쓰는 일이 뭐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방역 마스크만 잘 사용했다면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분명 지금의 절반 이상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와 의견을 달리한 이 곳 콜로라도 주와 뉴멕시코 주는 강력한 마스크 착용이 의무화되면서 타주에 비해 확진자 수가 월등히 줄어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마스크 착용에 대해 ‘반드시’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대통령이 솔선수범하지 않자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에 강력반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보다 세계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하고 배려해온 그동안의 미국의 모습은 사라졌다. 공중보건에 위배되는 이러한 사태를 미국 정부 스스로가 만든 셈이다. 마스크 효능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다른 방역 대책을 국민에게 제시했어야 했다. 강력한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의무는 국가차원에서 수없이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마스크 착용에 대한 찬반논의를 여전히 벌이고 있는 중이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언급 또한 뜸해졌다. 트럼프는 방역책이 우선이 아니라, 표심 노리는 일만 궁리하고 있어 보인다. 이번에도 자기마음대로 경기부양책을 승인했다고 발표했지만, 실현 가능성이 낮은 헛발질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지원금은 많을수록 좋고 가계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임시방편으로 돈 퍼주기 보다는, 코로나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구체적인 경제 회생안을 공개해야 맞다.     


     지난 몇 년간 미국은 무역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을 묵과하고, 동맹국을 업신여기는 행태를 보여주면서 지금까지 세계의 질서를 정립해 온 경찰국가의 이미지를 잃어버렸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결과 주변국가들과 분쟁만 일어났고, 대담하고 포용적이었던 대국의 이미지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트럼프 정부의 위기대처능력은 전 세계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지금껏 많은 이민자들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닭공장에 다니거나 위장결혼과 같은 불법까지도 마다않고 미국 시민권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힘들게 취득한 시민권이 이제는 여기저기서 푸대접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모든 일에는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있다. 트럼프는 이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결국 전 세계가 미국인의 입국을 꺼리면서 미국의 여권은 힘을 잃었고, 미국 시민권 취득에 대한 열망도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루 확진자가 6만명에서 5만명으로 되자, 확산세가 누그러졌다는 황당한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지금이라도 과학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현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냉철한 진단을 내려야 한다.  '국민이 방역'이라는 슬로건 아래 개인의 방역이 현재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나서서 부각시켜야 한다. 그것이 정부와 국민 간의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세계 대국으로서의 추락한 품위를 그나마 되찾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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