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지난 28일 사퇴했다. 이로써 2012년 12월부터 8년 가까이 일본을 이끌며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세운 ‘아베 시대’가 막을 내렸다. 아베 총리는 13년 전에도 갑작스런 사퇴 선언으로 일본을 발칵 뒤집어놨다. 당시 총선에서 야당에 대패하고 국정운영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도망가는 거냐는 식의  의구심이 쏟아졌다. 그런데도 그는 기자회견 내내 '아파서 그만둔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회견 다음날 입원한 사실이 알려졌고, 열흘이 지났어야 ‘아팠다’고 털어놨다. 열일곱살에 발병한 희귀병 궤양성 대장염이 사임 결심으로 이어졌다고 고백한 것은 넉 달이 지나서였다. 아파서 그만둔다고 하느니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도망간다고 욕을 먹는 게 차라리 나았던 모양이다. 이 병은 복통, 설사, 혈변을 유발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으면 증상이 심해진다. 이번에도 같은 지병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일본인들은 아파서 그만두는 정치인들에게 유독 인색하다. 개인적인 이유로 집단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경계하는 데다 체력을 정신력과 연관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물리적으로 서구에 대항할 수 없었던 일본은 '정신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논리로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이 때문에 '아프면 쉬라'는 정부의 코로나 지침은 일본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병가를 거리낌 없이 내는 미국의 직장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은 어지간해서는 쉬지 않는다. 해열제를 복용해가며 환자를 진료한 의사, 목이 아픈 것을 참아가며  음식을 배달한 학교급식 보조원, 몸살 증상에도 신칸센을 타고 출장길에 오른 회사원은 결국 바이러스를 옮겼다. 이러한 정서 속에서 아베의 사임 발표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아베 총리는 어렵사리 자신의 병에 대해 입을 뗀 13년 전과는 달랐다. 그는 사퇴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궤양성 대장염 재발 판정을 받은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 뒤 "체력이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치 판단을 그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과감한 결단이었다. 그만큼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방증이다.


    아베 총리 하면 '슈퍼 마리오'가 떠오른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일본 게임회사에서 만들어낸 최강 캐릭터이다. 아베는 이 슈퍼 마리오 분장을 하고 2016년 브라질 리우 하계올림픽 폐회식에서 펼쳐진 홍보 문화 공연에 깜짝 등장했다. 일본의 최고 정치인이라는 무게를 벗어 던지고 일본 대중문화의 각종 캐릭터를 앞세운 공연에 코믹한 마리오 복장을 하고 경기장으로 나온 것이다. 치밀히 계산된 연출임을 알면서도 그 창의성과 대담성은 높이 살만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베 총리는  '슈퍼 아베 마리오'가 되었다. 만약 모든 것이 순조로웠더라면 아베가 사퇴를 발표하는 시기는 하계올림픽과 패럴림픽 분위기가 깔끔하게 마무리된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폐회식에서 당당하게 "일본이 전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외치길 간절히 꿈꿨다. 일명 아베올림픽이라고 불릴만큼 도쿄올림픽은 초기 구상 단계부터 아베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됐다. 그는 올림픽이 도호쿠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경기 침체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방사능, 폭염, 내부 반발에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며 올림픽 진두지휘에 나섰다.


    하지만 아베의 퇴장으로 도쿄올림픽 개최는 더욱 불분명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올림픽이 사실상 취소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로서는 눈물을 머금은 사퇴 발표가 아닐 수 없다. 초기에 코로나의 불씨를 끌 기회가 있었지만 아베 총리는 올림픽 정상 개최에 지장을 줄까 머뭇거리다 골든 타임까지 놓쳐버렸고, 이에 그의 정신적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동안 아베는 한국과 좋은 친구는 아니었다. 아마도 가장 악화일로를 걸었던 총리로 기억될 것이다. ‘아베노믹스’등 적극적인 경기 부양책으로 일본인들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장기 집권에 성공했지만, 외교적으로는 보수 강경 일변도 노선으로 주변국들과 충돌을 자초했다. 특히 한국과 관련해서는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했고,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가 하면 대법원의 일제 징용 배상 판결을 ‘국제법 위반’이라 맹공하며 무역 보복 같은 극단적 조치를 취하는 등 노골적으로  ‘한국 때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또, 일본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의 영토'라는 내용을 실어 집권 내내 한일 관계는 냉랭했다.

 

     그런 만큼 아베의 퇴진은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 변곡점이 돼야 한다. 차기 총리로  스가 관방장관, 기시다 자민당 정조회장, 이시바 전 자민당 간사장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당장 한일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전망이다. 이들은 한일관계의 최대 현안인 위안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같이 자민당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 판결은 65년 한·일 수교로 매듭지어진 식민 지배 배상 합의를 일방적으로 뒤집은 넌센스라는 인식이 여야를 막론하고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한·일은 동북아에서 단둘뿐인 민주주의 국가이자 미국과의 동맹국이다. 안보와 경제에서 공존 번영해 갈 수밖에 없는 관계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협력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일본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 속에서 한국을 안아야 할지, 중국 쪽으로 밀어야 할지 고민 중이고, 한국 또한 어정쩡한 대 일본 외교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출 규제를 한다고 했지만 실제 수출은 거의 다 승인했다. 징용 문제도 일단 관망 자세다. 이쯤 되면 징용을 비롯한 과거사는 시간을 두고 풀어가되, 경제·안보 현안은 조속히 협력하는 분위기를 복원하는 투 트랙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우물쭈물하면 주도권은 우리가 쥘 수 있다. 되려 우리가 일본을 안을 것인가, 밀어낼 것인가를 결정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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