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 당시 덴버 한국일보에서 일하면서 설운도와 주현미 공연을 주최한 적이 있다. 당시 콜로라도에는 오랫동안 연예인의 공연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공연예술에 메마른 교민사회에 위로와 단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6개월에 걸쳐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트롯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가수 태진아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는 송대관씨와 듀엣을 제안했지만, 출연료가 콜로라도의 실정에는 턱없이 높았다. 그래서 두번째로 설운도씨에게 연락을 했다. 함께 왔으면 하는 가수로 주현미씨를 제안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필자는 곧바로 주현미씨에게 연락을 취했고, 이틀 후 공연을 하겠다고 답변을 주었다. 하지만 미국까지 와서 덴버 공연만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출연료를 맞추기 어려웠다. 그래서 구상한 것이 시카고 한국일보사에서 먼저 디너쇼를 하고, 그 이틀 후 덴버에서 공연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성사된 것이 설운도 주현미 덴버 공연이었다. 공연장이 없어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간신히 잡은 곳이 퍼포밍 아트센터였다. 하지만 가수들과 공연장의 일정을 맞추다보니 5천석짜리 공연장 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공연장과 얘기 후 객석의 반은 검은 천으로 덮기로 하고 2천5백석만 받기로 했다. 설운도씨와 주현미씨는 일정에 맞춰 도착했고 공연의 막은 올랐다. 하지만 1천명 정도 밖에 차지 않은 객석으로 인해 공연장 분위기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덴버에서 한인 1천명 정도가 모이는 일도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워낙 큰 공연장을 빌리다 보니 차라리 작은 공연장을 빌렸으면 이렇게 썰렁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이 공연을 위해 필자는 물품 후원 외에 현금 3만7천달러라는 고액의 후원금을 모았지만, 결국 공연의 성공 여부를 따지는 과정에서 한국일보사를 그만두었다. 그 뒤로 트롯은 외면하고 싶은 영역이 되었다.    


     그 후로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지금 필자는 트롯에 푹 빠졌다.  두어달전 친정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한동안 식당에서 밥도 먹지도 않았던 내가 바이러스가 우글거리는 시애틀 공항을 지나, 인천공항까지 간 것이다. 마스크 위에 페이스 쉴드까지 겹겹이 얼굴을 가리고 18시간만에 도착한 인천공항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모국 방문시 가졌던 정겨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중국인들과 같은 수속대 앞에서 수속관의 입국허가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공항 직원에게 자가진단 앱 설치를 확인받고, 여섯 장의 서류를 꼼꼼히 작성하면서 두어 시간만에 마지막 검사관 앞에 섰다. 하지만 고난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검사관은 2주의 자가격리를 위해서 개인적으로 구해놓은 오피스텔은 허락되지 않고, 국가가 지정한 곳으로 가야 한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한참 실랑이 끝에 10년전에 발급해놓은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여주며 가까스레 국가지정 호텔행을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 달 임대한 오피스텔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대중교통의 이용은 절대 불가하며, 가족 외 픽업 인원도 제한적이었다. 간신히 공항을 빠져나왔지만 몇 시간 동안 바이러스 취급을 받은 듯한 부담스러운 기분은 오피스텔로 향하는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리고 2주의 자가격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격리기간 내내 장마와 태풍이 몰아쳤고, 문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답답함, 매일 거처를 찾아와 격리를 확인하는 주민센터 공무원에 대한 중압감, 두 번이나 치른 코로나 검사 등은 자가 격리 중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어떤 이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우울했다. 


    그런 격리기간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동안 외면해왔던 트롯이었다. 사실 한국은 지금 트롯이 대세이다 보니 굳이 외면을 하고 싶어도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트롯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격리 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은 TV와 함께 했다. 한국에 백개가 넘는 채널이 생긴 것도 놀라웠지만, 채널을 돌릴 때마다 트롯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미스터 트롯, 보이스 트롯, 트롯신이 떴다, 사랑의 콜센터, 뽕숭아학당 등의 본방송과 밤에는 재방송이 이어지면서 한채널 건너면 어김없이 트롯 가수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많은 트롯 프로그램이 있다니, 그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듣다 보니 필자도 어느새 트롯에 푹 빠져들었다. 노래마다 사연이 있고, 듣고 있으면 울컥하고, 따라 부르면 흥이 나고, 쉬운 가사와 낯익은 멜로디는 격리 중인 필자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 코로나로 힘들고 지친 국민들이 트롯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 트롯 하면, 노인들이나 좋아하는 장르라는 고정관념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트롯은 어린이부터, 아이돌, 개그맨, 일반 주부, 청년 등 신세대들도 열광하는 또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았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격리기간을 마치고 드디어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퇴원후에도 수술 2주 후 잡혀있는 내원일까지 엄마와 둘이서 오피스텔에서 지내며 삼시세끼를 함께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가 언제쯤 침대에서 혼자 일어날 수 있을지, 회복은 잘 되고 있는지 등 많은 걱정들이 밀려왔지만 그때도 트롯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나,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도 우리 모녀는 트롯을 들으면서 즐거운 에너지를 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술 후 첫 내원을 했고, 결과는 의사도 놀랄 정도로 기적에 가까웠다. 트롯에 푹 빠져 있었던 한 달, 한국 속으로 더 가까이 들어간 기분이다. 지치고 막막했던 입국심사, 무섭고 두려웠던 코로나 스트레스, 매시간마다 걱정되던 엄마의 건강, 이 모든 것들을 트롯이 풀어준 듯하다. 다시 귀국하는 여정에도 트롯의 흥이 힘을 보탰다. 지금 대한민국은 트롯의 열풍에 휩싸여있다. 그래서인지 트롯은 이제 응원가처럼 들린다.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때로는 인생 역경을 이겨나가는 친구가 되고, 때로는 코로나 극복을 염원하며 서로에게 불러주는 응원가(應援歌)가 되었다. 그렇기에 트롯 열풍은 당연해 보인다. 최근 타임지에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방탄소년단이 표지를 장식했다. 트롯도 K-팝처럼 K-트롯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날이 머지않아 오지 않을까? 그날을 기대하며, K-트롯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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