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하고 시신에 기름을 부은 뒤 불을 질렀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며칠 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이례적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며 신속히 사과했다. 그러자 문재인 정권은 김정은의 ‘미안하다’는 한마디에 속없이 감격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보고와 분석으로 50시간을 허비했고, 북한의 만행을 지켜만 봤다. 북한이 소연평도 해상에서 실종된 해수부 소속 공무원 이씨를 발견한 시각은 22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이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된 것은 당일 오후 6시 30분경이었다. 3시간가량 뒤인 밤 9시 40분경, 단속정의 북한군이 이씨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렇다면 이씨는 청와대가 보고를 받은 후에도 3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는 얘기다. 세월호 사고 때 문 대통령이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며 보인 반응대로라면 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북한에 이씨의 신변안전부터 요청했어야 했다. 헝가리 한국인 관광객 유람선 침몰 사고가 벌어졌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라며 외교부 장관까지 현장에 파견했던 문 대통령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이 터진 후 북한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유엔총회 연설에서 내세울 ‘종전선언’이벤트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이 사고 관련 메시지를 내놓은 것은 사고 발생 후 이틀이나 지난 24일 오후 5시였다. 그나마도 메시지의 수위는 '매우 유감, 용납 불가, 책임 있는 조치 요망' 정도에 그쳤다.


    남한 군 당국이 이씨의 신원을 파악한 때부터 그가 북한 총격으로 숨진 6시간 동안, 군의 구출 조치는 사실상 전무했다. 군은 북한 수상사업소 선박이 이씨를 발견해 월북 경위를 추궁한 뒤 해상에 장시간 방치한 과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모든 채널을 통해 안전 송환을 요구하고 불응할 경우 강력한 대응 조치에 나섰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씨가 여섯 시간 만에 사살당하고 불태워지는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군은 “우리 영해가 아니다”며 손을 놓고 지켜만 봤다. 군의 존재 이유인 국민의 생명 보호를 저버린 것이다. 그래놓고 “북한이 그렇게까지 나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에다 “9·19 합의에 총 쏘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는 북한 감싸기로 넘어가려 하니 참담하다.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 군이 우리 국민이 적군의 총부리 앞에 놓여있는 절체절명의 6시간을 구경만 했다. 국방부가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구하기의 절반만큼만 노력했어도 북한의 만행을 막았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북의 엽기 살인 만행이 벌어진 이틀간 문 대통령의 행적은 의문투성이다. 최소한의 구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세월호 사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7시간’을 거론하며“긴박한 사고의 순간에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사고를 챙기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젠 그의 차례이다.


     이씨는 자녀 둘을 둔 47세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런데 군은 그가 월북을 시도하다 살해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업무상 단순 표류하다 북한 수역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씨의 친형은 군에서 주장하는 동생의 월북은 억측이라고 한다. 설령 이씨가 월북을 시도한 게 사실이라면 북측이 왜 사살했는지도 의문이다. 지난 7월 성폭행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북한으로 간 탈북민도 받아준 북한이다. 게다가 북측은 시신이 아니라 부유물만 소각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야만적 처사를 ‘현장 군인들의 불법 침입자 사살’ 사건으로 성격을 바꾸려는 것이다.  민주국가와 독재국가의 가장 큰 차이는 국민의 목숨값이다. 민주국가 지도자는 국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굴욕도 무릅쓴다. 2009년 김정일은 미국 여성 기자 두 명을 체포하고 석방 조건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을 요구했다. 김정은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를 억류하고 미국 고위 인사의 방북을 석방 조건으로 내걸었다. 미국은 국민의 목숨부터 살린다는 가치를 기준으로 북한의 억지를 일부 수용했다. 일본도 2004년 고이즈미 총리 당시, 경제 제재로 궁지에 몰리던 김정일이 북·일 국교 수립에 따른 배상금을 받아내려고 ‘일본 총리가 북한에 오면 납치 피해자를 돌려보내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그는 독 묻은 미끼인 줄 알면서도 평양에 가서 일본인 5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집권 초기부터 소련과의 수교를 강력히 반대했던 서독의 초대 총리 아데나워 또한 반대파의 비난을 무릅쓰고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여 억류 중인 1만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국민이 먼저'라는 정치는 이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대한민국의 국민은 서럽다. 경제 규모가 세계 10위권 국가라고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에게 국민의 목숨값은 하찮은 모양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시대에 진행된 다섯 번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어느 대통령도 6.25 전쟁 때 북한으로 납치된 국민, 국군포로, 납북 어선 선원, 납치 민항기 조종사와 승무원의 송환 문제 등 이 중 한가지라도 꺼낸 적이 없다. 송환은커녕 생사 여부를 물은 대통령도 없었다. 이번 사건에 대한 김정은 위원장의 사과가 이례적인 건 사실이다. 절대 틀릴 수 없다는 김 위원장이, 그것도 남쪽 사람들을 향해 “대단히 미안하다”고 말할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표류였든, 자진 월북이었든 우리 국민이 북녘 바다에서 사살 되었다. 이것이 팩트이다. 우리 공무원이 희생됐지만 이를 이유로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도 적절치 않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그저 심심한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 정부와 북한이 밝힌 사건 경위는 차이가 크다. 김 위원장의 말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진상 규명을 위한 남북 공동조사와 책임자 처벌 등 후속 조치가 따라야 한다.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도 내려져야 한다. 하루빨리 시신도 찾아야 한다. 국제형사재판소에 제소하고 웜비어처럼 보상도 청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앞장서서 명명백백 밝혀야 하는 정부가 북한의 사과 한마디를 들었다고 해서 느슨해 보인다. 국민들이 받은 충격과 분노는 김정은의 사과 한마디로 풀릴 수 없다. 이번 만행은 북한군이 비무장 상태의 우리 국민을 총살한 무력도발이 분명하다.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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