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경제계의 거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인 이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경영 승계 이후 2014년 입원 전까지 약 27년간 삼성그룹을 이끌었다. 선친인 이병철 회장 타계 후 13일 만인 1987년 12월 1일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취임하자마자 삼성은 위기에 봉착했고, 심사숙고 끝에 내놓은 것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로 유명한 '신경영 선언'이다. 그래서 10조원이었던 초기 매출은 그가 경영을 맡은 27년 동안 40배, 시가총액은 300배 이상 늘어났고, 무엇보다 삼성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한민국의 경제 브랜드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 회장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일등공신이라는 평가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업적 중 가장 칭송받는 것은 한국을 일본의 기술 속국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1974년 반도체에 대한 투자 결정 과정이 대표적이다. 삼성 안에서 반도체 진출 계획을 처음 꺼낸 게 이 회장이다. 호암 이병철 회장마저 위험이 크다며 결정을 미루자, 이 회장은 사비를 털어1974년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자신의 사재를 보태서라도 한국을 기술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려던 그의 의지는 대단했다. 당시 자본, 기술, 시장이 없기 때문에 삼성의 반도체는 안 된다는 게 업계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적인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 나섰고 스스로 자료를 분석해 나갔다. 1986년 7월 삼성은 1메가 D램을 생산하면서 반도체사업에 자신감을 얻었다. 일본이 주춤하는 사이 과감한 투자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1992년 삼성은 마침내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내면서 반도체 강자로 우뚝 섰다. 1993년에는 기존 6인치 웨이퍼가 주류를 이루던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은 8인치 생산을 결단했다. 생산량을 늘리면서 시장 점유율도 1위를 기록, 기술과 생산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이 회장은 취임 5년째였던 1993년 2월, 임원들과 해외시장을 순방했다. 하지만 첫 방문지였던 로스앤젤레스의 베스트바이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삼성TV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일명 '후쿠다 보고서'를 접하게 되는데,디자인 전문가로 89년 삼성이 영입한 후쿠다 다미오가 작성한 56쪽자리 보고서에는 '기본이 안돼 있는 삼성'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순방을 중단하고 곧바로 도쿄로 날아가 후쿠다를 만났고, 일본 측 고문들만 따로 불러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밤샘 토론을 벌였던 일은 이미 잘 알려진 일화이다. 이것이 지금 삼성전자가 전세계 가전제품 분야를 지배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이 회장은 신경영 선언 이후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해 사업에 박차를 단행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가 학창시절 들고 다녔던  애니콜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애니콜 휴대전화 출시 당시 불량률은 11.8%에 달했다. 품질경영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했던 이 회장이 구미사업장에서 불량품 15만대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진행한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휴대폰 시장은 모토로라가 석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5년 8월 애니콜은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쳤다. 당시 대한민국은 애니콜의 신화로 인해 모토로라가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로 기록되었다. 이외에도 ‘숨어있던 1인치를 찾아라’로 유명한 ‘명품 플러스원 TV’도 이 회장의 지시에 의해 탄생했다. 1996년 당시 TV의 표준화면 규격은 4:3이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화면 규격은 이보다 가로가 조금 더 긴 12.8:9였다. 이 회장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이 점을 지적했다.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영상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규격의 TV를 만들라는 지시였다. 그 결과 숨겨진 1인치가 더 늘어난‘명품 플러스원 TV’가 등장하면서 삼성전자 TV는 새롭게 주목받게 됐다. 결국 삼성은 TV 부분에서도 맹주 소니를 꺾고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는 스마트폰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갤럭시 신화를 썼다. 조세포탈 혐의로 회장직에서 물러났다가 2010년 복귀와 동시에 그의 건재함을 과시한 것이 이 갤럭시였다. '아이폰 열풍'으로 글로벌 휴대폰 시장에서 헤매던 삼성전자는 '갤럭시S'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갤럭시S2와 갤럭시S3도 연이은 히트를 기록했다. 특히 갤럭시노트 시리즈가 가세하면서 2012년 하반기에는 애플을 뛰어넘고 글로벌 1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탄탄대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이 회장 역시 한국의 오랜 정경유착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 한나라당 불법 정치자금 모금 사건에 연루되었고, 양도소득세 수백억을 포탈한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기도 했다. 또, 2012년에는 큰형인 고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상속 분쟁을 겪었다. 이 회장이 여러 비리에 연루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을 세계에 각인시킨 업적은 더욱 상당하다. 그는 취임식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초일류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꿈은 대한민국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항상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제일주의’를 강조한 이 회장의 집념과 승부욕은 삼성의 기업문화로 자리잡았고, 이는 대한민국 경제계의 대표 정신으로 이어졌다. 그는 한국도 일등을 할 수 있는 국가임을 몸소 증명해 보인 장본인이다. 20년 전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삼성 로고를 가리키며 “아이 러브 코리아”를 외쳐주던 그곳 사람들을 보면서,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해 여행객 입국이 불가능할 때 삼성 직원에 대해서만 입국 특혜를 제공한 아시안 국가들을 보면서, 삼성은 일개의 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상징이 되어 버렸음을 실감했다. 그를 단순한‘삼성맨’으로만 국한시킬 수 없는 이유다.  결국‘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는 그의 경영철학은 초일류 삼성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지금까지의 그의 노고에 감사를 올리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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