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담임목사

    성경을 보는 핵심적인 개념 중의 하나가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공동체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들이 선명하게 열릴 때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자들의 죄를 너무 과하게 다루시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에피소드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약 여호수아에 나오는 여리고성 싸움 이후 외투를 훔친 아간의 범죄를 다루시는 장면이고, 신약에서는 사도행전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일부를 바치고 전부를 드렸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입니다. 어찌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른 죄의 심각성보다 공동체를 깨는 범죄였기에 엄중히 다루셨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시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편133:1). 무엇이 그리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까? “unity” 하나 됨입니다. 가족 공동체의 아름다움,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은 하나 됨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픔을 기꺼이 나눌 수 있을 때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말로만“우리는 하나!”라고 외치는 선포적인 의미가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함께 아파할 때 하나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합니다.“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에베소서1:23). 어떤 교회가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려면 무엇을 보면 될까요?

 

     교회 안에서 약하고 아픈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몸을 보면 평소에 건강한 부위는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위가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위가 약하고 아픈 사람이 아닐까요? 요즘에 제 팔이 몹시 아픕니다. 평소에는 별로 팔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는 제 팔에만 온통 신경을 쓰며 사는 것 같습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프고 약한 것이 느껴지는 것은 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유난히도 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 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들을 위해 추수를 다하지 말고 일부러 남겨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대교회는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 때문에 서로 다툴 정도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약하고 아픈 자들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탕자의 형이 비난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불성실해서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 나간 동생을 향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형은 몰랐습니다.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실함은 공동체에 독이 됩니다. 오히려 그 성실함이 하나 됨을 깰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성실해 보이지만 지탄을 받는 이유는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고 하나 됨을 깨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코드가 일치되는 것에 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라는 찬양처럼 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가 아파하는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물질을 나눌 수 있을 때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은 안식년마다 정기적으로 휴경을 해야 했습니다. 6년 동안은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일구어 열매를 거둘 수 있었으나 제7년인 안식년에는 밭에 파종해서도 안 되고 포도원을 경작해서도 안 됩니다. 땅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년에 스스로 난 곡물과 경작하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힌 열매는 거두어 들여서는 안 되고 그대로 땅에 두어, 안식년의 소산을 그 가족뿐만 아니라 종과 품꾼, 객, 육축, 들짐승들까지 모두 공유하여 안식년만큼은 '우주적 밥상공동체'를 실현하게 하셨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 물고만 있으면 입에서 썩습니다. 잘 씹어서 삼키면 온전하게 온몸에 영양분이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 됨의 모습입니다. 우리 중에는 물질의 축복을 받아 입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지체들을 먹이고 나누라고 물질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세리장 삭게오가 예수님 만나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19:8). 삭개오의 기쁨이 돈을 모을 때 더 컸겠습니까, 아니면 나눌 때 더 컸을까요?. 모으는 기쁨은 잠시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누는 기쁨은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나눔 자체가 기쁨이고 공동체의 하나 됨을 이루는 풍성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된 공동체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눌 때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몸 아픈 것에는 유별나게 반응하면서도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의 아픔에 대해는 눈물이 없었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물질을 나눌 수 있을 때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으는 기쁨보다 나누는 기쁨을 더 많이 경험하며 사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나눔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때 그 교회는 세상을 살리는 교회가 되고, 하나 된 공동체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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