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산티아고 외곽에 사는 네 아이의 엄마 신티아 곤살레스는 8개월간 아침마다 알람을 맞춰 놓고 경구 피임약을 복용했다. 중고 의류를 팔던 노점상 일자리마저 잃어 먹고살기 더욱 힘들어진 상황에서 또 한 번의 임신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해 5월 그는 다섯 번째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이제 2개월 아기의 분윳값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 CNN이 6일 사연을 소개한 곤살레스는 칠레에서 불량 피임약을 먹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170명 여성 중 한 명이다. 알려진 것만 그 정도일 뿐 피해자는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복용한 것은 독일 제약사 그뤼넨탈의 자회사 실레시아에서 제조된 '아눌렛 CD'라는 경구 피임약이었다. CNN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칠레 보건당국은 이 약에 결함이 의심된다는 보건소 직원들의 신고를 받고 특정 제조단위(batch)의 제품 13만9천160팩을 리콜 조치했다. 아눌렛 CD는 여성들이 매일 복용하도록 21개의 노란색 실제 피임약과 7개의 파란색 위약이 한 팩으로 구성됐는데, 문제의 제품엔 실제 약과 위약이 뒤섞여 있었다. 보건당국은 보건소 등에 해당 제조단위 제품을 쓰지 말도록 하고 트위터로 리콜 결정을 알렸다. 그러나 리콜 결정을 본 소비자는 많지 않았다. 이어 9월엔 다른 제조단위에서도 결함이 발견됐다. 심지어 당국은 일주일도 안돼 실레시아에 다시 제조 허가를 내주고 아눌렛 CD도 다시 유통할 수 있도록 했다. 제조 결함이 눈으로도 확인되기 때문에 의료인들이 불량 제품을 걸러낼 수 있다는 이유였다. 문제를 공론화한 것은 시민단체였다. 여성단체 '밀레스'가 이 피임약의 결함 사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지했고, 언론 등을 통해 문제를 알리며 피해 사례를 수집했다. 칠레에선 성폭행 임신인 경우 또는 태아나 임신부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에만 낙태가 허용되기 때문에 뒤늦게 원치 않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여성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가 커지자 정부는 지난 2월 뒤늦게 실레시아에 6억650만 페소(약 1억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해당 피임약에 제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임에도 제약사와 정부는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그뤼넨탈 대변인은 제조 결함에도 피임약 효능엔 영향이 없다며 경구 피임약 효과가 100%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피임약을 올바르게 지속해서 복용했을 때의 임신 확률은 1% 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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