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머니는 마지막 열두번째 항암치료를 마쳤다. 어머니는 코로나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지난 6개월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큰 부작용 없이 항암을 마쳤고, 빠르게 쾌유하고 있는 듯해서 한시름 놓인다. 하지만 만약 엄마의 투병 기간이 길어진다면,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버이날이 다가오니 반성할 것들이 여럿 보인다. 지난해 8월 엄마는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필자는 코로나 시국에다 매주 신문을 발행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가득 걱정을 안고 막상 도착한 한국의 8월은 후덥지근했고, 그다지 정답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까다롭기 짝이 없는 공항 수속을 간신히 마치고 찾아간 오피스텔은 문을 열자마자 답답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여기서 2주를 버틸 수 있을까. 조그만 창 밖으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고, 그 사이 두어번 태풍주의보도 떴다. 인적이라고는 하루에 한번씩 나를 감시하러 오는 공무원 아저씨가 전부였다. 답답한 마음에 하루에 몇번씩 오피스텔 문을 열고 머리만 내밀어 복도를 둘러보았다. 세 집 건너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까지 가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집을 떠나며 가졌던 엄마를 향한 애절했던 효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면서 ‘괜히 왔나’ 하는 후회가 하루에도 몇번씩 밀려들었다.

   

     20여년 전에도 그랬다. 어렵사리 방송국에 새끼 작가로 취직을 하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 차는 폐차시켰고, 허리뼈에 금이 가 장기간 입원이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때도 마치 대단한 효녀인 양 호들갑을 떨며 사직서를 제출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짐을 싸서 엄마에게 내려갔다. 그런데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생활한 지 삼일이 지나자 후회가 밀려왔다. 일주일이 지나자 다시 서울로 가야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이처럼 내 방식대로의 효도는 진득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늘 한결같았다. 큰아이를 낳을 때 어머니는 시애틀로 오셨다. 건강하지 못했던 첫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서 첫 주를 보냈고, 다음 한 달 동안은 아동병원에 입원을 했다. 나는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고 남편은 새벽 일찍부터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친정 엄마의 몫이 됐다. 한국에서 막 도착한 엄마가 어떻게 미국병원에서 아이를 간호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역시 엄마는 달랐다. 물이 필요하면 물컵을 보여줬고, 기저귀가 모자라면 기저귀를 들어올렸다. 우유가 필요하면 우유병을 보여주며 손주를 돌보는데 필요한 것들을 살뜰히 챙겼다. 미국에 처음 와서 영어발음이 이상하게 들릴까봐, 문법이 틀릴까봐 걱정하던 우리와는 확실히 달랐다. 그렇게 엄마는 석달을 계셨다. 간이식 수술을 받았던 남편은 수술 전까지 5년동안 한국에서 약을 타서 복용했다. 우리는 한달에 수천달러씩 하는 비싼 약값 때문에 미국에서 약을 살 수가 없어 차라리 1년에 한번씩 한국에 가서 진료를 받은 후 약을 처방받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5년동안 한달도 빠뜨리지 않고 정확한 날짜에 병원을 가서 사위의 약을 받아 미국으로 보내주었다. 어머니 집에서 병원까지는 한시간 거리였는데, 교통 체증으로 도로가 막히면 왕복 세시간은 족히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한번도 귀찮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산 지난 20년동안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옷과 양말, 내의, 때밀이 수건, 행주, 프라이팬, 사위를 위한 홍삼정들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한번은 간이 안 좋았던 남편을 위해 생물 다슬기를 미국으로 보내준 적도 있는데 하필이면 도착 날짜가 주말에 끼어 배달 일정이 월요일로 잡혔다. 그런데 배달 일정보다 빠른 토요일 오후, 관할 우체국에서 소포를 직접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직원은 냄새 때문에 우체국 안에 도저히 둘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드라이아이스로 꽁꽁 싸매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날씨에 다슬기가 모두 폐사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필자가 대학 다닐 때도 그랬다. 한달에 한번씩은 기숙사에 와서 청소와 빨래를 했고, 철마다 이불을 바꿔 주었다. 한 번은 내가 가지고 있던 셔츠 17장을 모두 꺼내 다림질을 해놓고 가신 일도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필자는 서울에서 여섯번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가장 힘들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것도 힘든데 올 때마다 어찌나 일을 많이 하고 내려가시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못된 딸이 확실하다. 서울 딸네 집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구경도 다녀야 하는데 매번 침대 옮기고, 책상 바꾸고, 빨래하면서 가정부가 따로 없었다. 미국 딸네 집에 왔을 때도 그랬다. 부산에서 인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덴버에 왔지만 피곤한 기색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렇게 세번을 오셨다. 오실 때마다 소뼈 사다 곰국 끓여놓고, 돼지고기 사다 돈까스 만들어 놓고, 무와 배추 사다 김장을 해 놓으셨다. 가시고 난 뒤 열어본 냉장고에는 번호가 붙여진 김치통이 10병이 있었다. 1번부터 10번까지, 숫자가 뒤로 갈수록 젓갈을 조금씩 더 넣어서 오래 두고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갱년기일 때 연년생인 나와 언니 오빠는 사춘기였다. 이제 필자가 엄마의 나이가 되었고 나의 두 아들은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지난 주말, 아들을 향해 소리지르며 화내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 옛날 나의 사춘기 시절에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한번도 소리치거나 역정을 낸 적이 없으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엄마가 했던 것처럼 용감하고 무조건적인 강인한 엄마가 되는 것에는 자신이 없다. 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갈 수 없어 엄마를 두었다고 했던가. 엄마의 무수한 밤은 알알이 자식들 걱정이었다는 것을,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는다. 엄마는 어렵고 힘들 때, 외롭고 지칠 때 자연스럽게 불러보는 주문과도 같다. 엄마라는 주문을 외우면, 모든 근심과 걱정이 마법같이 사라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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