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버삼성장로교회 이동훈 담임목사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는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디모데후서3:3)입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는 말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원통한 일을 만든 가해자라면 원통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 기꺼이 용서를 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피해자 입장에서도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특히 원통함을 푸는 핵심적인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원통함은 풀리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피해자 입장에서 이 원통함을 아름답게 풀고 해결했던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구약 창세기 마지막에 등장하는‘요셉’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종살이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원통하고 절통한 피해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모든 고난을 이기고 애굽의 국무총리로 우뚝 섭니다. 그리고 흉년을 당해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내려온 형들을 극적으로 만납니다. 이 때가지만 해도 가해자인 형들은 피해자인 동생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형들의 가족 칠십 명을 애굽으로 이민시켜 자신의 곁에서 살게 해 줍니다. 드디어 아버지 요셉이 죽었습니다. 이제 가해자와 피해자만 남은 것입니다. 애굽의 국무총리인 동생 요셉의 보복이 두려운 형들이 먼저 아버지 요셉의 유언을 빌미로 동생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세기50:17). 동생 요셉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죄를 이제 용서해 달라”는 형들의 말에 요셉은 이렇게 형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세기50:19).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무슨 말입니까? “형들의 죄악을 심판할 권한이 나에게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죄를 심판하는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심판만 그렀습니까?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고 말고의 권한도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용서는 권한이 아니고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의 권한을 주장합니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전도연 주연의 한국영화‘밀양’의 화두는“용서의 권한이 신에게 있는가? 피해자에게 있는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들을 유괴해서 살해한 가해자는 감옥 안에서 자신을 면회 온 피해자 어머니(신애)를 만나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평안하게 은혜가운데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들을 살해한 이 살인자의 말에 피해자는 분노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용서 안했는데, 누가 감히 용서를 한단 말이야!” 그 후로 이 피해자 어머니는 자신만이 행사할 수 있는 용서의 권한을 신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교회와 교인들을 상대로 보복을 시작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로의 원통함을 풀지 못하는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가해자 누구도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피해자 누구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용서를 구하고, 서로 용서하라!” 이 말씀대로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책임, 용서하는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형들에게 말하는 요셉은 심판하는 권한, 용서하는 권한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고 ‘용서하라’는 아버지의 유언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용서의 책임을 다합니다.

 

    요셉은 또한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세기50:20).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악입니까? 동생을 해하려고 한 형들의 악함입니다. 그런데 이 형들의 악을 선으로 하나님이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고 종살이 감옥살이 고생 고생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7년 흉년 기간에 애굽 백성뿐만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버지와 형들의 가족 70명을 애굽으로 이민 오게 해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를 요셉을 통해서 행하신 것입니다. 왜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합니까? 내 원통함과 고통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알아야, 고통 중에서도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셨고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승리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평생 원수일 수 있는 형들에게 보인 요셉의 반응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13:1-3).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은 손에 쥐었는데 진정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사업 일구어 돈 버느라 진정 사랑해야 할 가정과 가족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다 가졌어도 사랑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사랑 없는 부와 성공은 늘 외롭고 슬플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성공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셉은 또한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진정한 인생의 성공은 사랑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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