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린 기자의 행복찾기

    요즘 냉장고를 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냉장고나 냉동실이나 음식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외식하고 남은 음식, 푸드뱅크에서 자원봉사 하다가 얻어온 식료품들, 얼마 전에 장 본 후 처박아둔 식료품들…. 이런 음식들로 냉장고는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냉장고를 여는 것이 두려워진다. 버리기는 아깝고, 먹기는 싫은 음식들로 냉장고는 꽉꽉 차 있어서 요구르트 한병 넣을 자리 찾기도 힘들어져 버렸다. 냉동실 역시 세일할 때 사놓은 각종 고기 종류와 냉동식품들로 한가득이다. 그래서 한국에 사는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 “마음 같아서는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가서 엄마네 식구들 다 데려와서 한 며칠 데리고 살고 싶어. 와서 냉장고 싹 비워서 배불리 먹이게 말이야"라며 툴툴댔다.  


    엄마는 6남매 중 장녀였다. 방 두칸짜리 월세집을 이곳저곳 전전하며 8식구가 복닥거리며 살았다. 엄마의 소원은 자신만의 책상 하나를 가지고 마음껏 공부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책상 대신 엄마에게 주어진 것은 13년 차이로 태어난 막둥이 여동생이었다. 외할머니는 중학생인 엄마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대기를 풀어 엄마에게 아기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아기를 등에 업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하며 외할머니를 도울 수밖에 없었고, 아기가 잠에 들면 그제서야 방구석 한켠에 작은 밥상을 펼쳐놓고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70이 훌쩍 넘어버린 엄마의 어린 시절은 참 가난했다. 그나마 하루에 배곯지 않게 보리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했을까. 외할머니는 꽁보리밥을 하면서, 한켠에 하얀 쌀밥 한줌을 함께 넣어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면 조심스럽게 쌀밥을 긁어내 참기름 한방울과 깨소금을 넣어 비빈 다음 소화 기능이 약한 어린 막내딸에게 먹였다. 나머지 가족들은 수북히 퍼놓은 김치 한사발을 반찬삼아 꽁보리밥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그나마 보리밥은 사정이 나았다. 쌀이나 보리가 떨어지는 날은 여지없이 수제비나 국수로 배를 채워야 했다. 운이 좋은 날은 멸치 몇 마리 넣고 끓인 육수를 맛볼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맹물에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간을 한 수제비를 상에 올렸다.  


    엄마가 예닐곱 살 때, 같은집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식구가 있었다. 너댓살 되는 사내아이 둘과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여자는 무슨 일을 하는지 늘 바깥으로 나돌아다녔고, 그렇다 보니 두 아이들은 늘 밥을 굶었다. 매일 작은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호작질만 하던 아이들이 안되보였던 외할머니는 하루는 없는 살림이었지만 아이들을 불러서 식구들과 같이 아침을 먹였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아이들이 아침식사 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방안으로 들어와 함께 밥을 먹었다. 꼬질꼬질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 마치 가족이나 된 듯 태연하게 섞여서 밥을 먹으니 처음 몇끼는 그렇다 치더라도 외할머니는 점점 아이들의 존재가 부담되기 시작했다. 내 새끼 6명 입에 넣을 밥을 나누어서 먹여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며칠을 그렇게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다가 아이들의 엄마에게 은근슬쩍 “아이들이 자꾸 와서 밥을 먹고 간다"고 언질을 줬다. 그랬더니 바로 그다음 날 그 여자는 아이들을 고아원에 데려다줘 버렸다. 아직 한창 엄마의 정이 그리울 그 어린 나이에 비정한 엄마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버려졌을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 외할머니는 이럴 줄 알았으면 몇 끼라도 더 챙겨서 먹일 것을… 하면서 한동안 자책했다고 한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네에서 자식 5명과 함께 7식구가 단칸방에 살던 집이 있었다. 그 집에 갔더니 그 집 여자가 보리쌀 한주먹 정도를 조그만 절구에 넣고 콩콩 찧고 있었다. 그녀는 한 명이 먹어도 부족할 양의 보리쌀을 물에 넣어 멀건 죽을 끓여 7식구가 한끼니를 연명하고 있었다. 또 환갑을 넘긴 나이의 영감에게 시집간 20살 앳된 처녀도 있었다. 처녀의 집에서 입 하나 덜어보겠다며 딸을 늙은 영감의 첩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었다. 아이 둘을 낳은 그녀는 본부인의 모진 구박을 받아 가며 힘들게 살았다. 당시 인근 철길에는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가 자주 지나다녔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면 조개탄이 하나둘씩 철로로 떨어졌는데, 가난한 동네 주민들은 그것을 주워모아 시장에 내다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이 첩도 그렇게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아귀다툼을 하며 석탄을 주워서 푼돈을 벌었는데, 하루는 석탄 줍느라 정신이 팔려 기차가 오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해 기차에 치어 죽고 말았다. 엄마의 죽음을 들은 어린 아들은 넋을 잃은 채 슬리퍼를 신고 대문 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큰딸은 본부인에 의해 사창가에 팔려 갔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할퀴고 지나갔던 그 시절에 그렇게 힘들고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사람들은 참 많았다. 먹고 살기 위해 다들 아등바등 힘겹게 살아갔다. 모든 것이 풍족해 넘쳐나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상상이나 했을까? 결과적으로 우리 부모님 세대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희생한 덕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지만, 그 시절의 비참한 삶을 누군가는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대한민국이지만, 잠시 숨을 고르며 뒤돌아보며 과거의 아픔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꽉꽉 음식들로 가득 찬 냉장고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드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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