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교회 허성영 담임목사

     지난 8월 24일 조선일보는  전직 아프가니스탄 판사 나즐라 아유비를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합니다. 그녀는 “지난 몇 주 사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많은 젊은 여성들은 성노예로 전락해 이웃 나라로 보내졌고, 어린 소녀들은 탈레반 전사들과 강제 결혼을 강요받고 있다”면서 “여성 인권을 존중하겠다던 탈레반의 약속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탈레반은 전사들에게 요리를 해주도록 여성들을 강제 동원하고 있다”며 “탈레반 전사들은 요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여성 몸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탈레반은 과거 집권기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앞세워 여성의 온몸과 얼굴을 가리게 하고 교육과 취업 기회를 박탈했습니다. 탈레반이 떠났던 지난 20년간 아프가니스탄 여성 인권은 크게 신장했지만 이번 미군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철수와 이로 인해 급격히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탈레반으로 인해 여성의 인권이 20전으로 회귀하는 것 아닐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에 근거가 되는 것이 이슬람 율법이 담긴 경전, ‘꾸란’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꾸란이 성경과 같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입니다. 꾸란은 구약성경을 변질시켜 만든 것입니다. 그 꾸란의 율법을 살펴보면 남녀 관계에 있어서 동격인 것도 가르치지만 차별에 대해서도 가르칩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우월하고, 여성을 지배하는 여성의 보호자이다,’‘남녀간의 상속에 차이가 있다,’‘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 두 여자의 증언이 한 남자의 증언과 동등하게 취급된다,’‘여성은 반드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겉옷으로 가려야 하며 가족 이외의 남자와는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남자에게 여자가 순종해야 하며 남편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한다’ 등 많은 율법이 남녀간의 차이를 두고 있고, 이로 인해 비이슬람권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지요.


    그런데 종종 기독교 커뮤니티 내에서도 여성의 복종을 강요하는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로 신약성경의 에베소서 5장 22절을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절에는“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언뜻 보면 탈레반을 비롯한 극단 이슬람 단체들의 여성 비하적인 관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을 자세히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류입니다. 사실 성경은 많은 문학이 그러하듯이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해당 구절이 담긴 에베소서가 쓰여진 시대는 1세기 그리스-로마 사회였는데, 이때의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지던 규범이었죠. 그런데 에베소서 본문을 당시 쓰여졌던 그리스 원문으로 보면 ‘복종’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에베소서 본문에는 22절과 24절에 두번에 걸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그리스 원문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21절에서 “그리스도의 경외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하라”라고 한 이후에 “아내들은 그리스도에게 하듯 남편에게.”로 22절이 이어지는 거죠. 그런데 우리말로 번역을 하다보니, 문맥상 자연스럽게 앞에 있는 복종하라를 이끌어 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22절의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는 것은 21절에서 언급하는 ‘상호간의 복종’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도 아내에게 복종하는 관계 가운데 아내도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어지는 25절에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를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을 요구하지만,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는 노예적인 복종을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여성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남성이 참 남성이라는 거죠. 이를 보면 탈레반이 강조하는 복종은 왜곡된 것이 분명합니다. 

 

    복종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들이 많은 부분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강압적인 부분이 있지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복종은 그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처럼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는 것’이 복종의 전제입니다. 즉,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복종을 하게 되니,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우리 또한 아내를, 그리고 남편을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지요. 진정한 사랑은 변치않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체험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을 바꿉니다. 심지어 탈레반조차 바꿀 것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