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곳곳에서 ‘금녀의 벽’이 허물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호주에서는 17세 소녀가 야구의 오랜 장벽을 무너뜨렸다. 호주 프로야구 제네비브 비컴이 여자선수로는 최초로 프로 무대에 선 것이다. 멜버른 에이스 야구팀은 새해 첫날 비컴과 육성선수 계약을 발표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열린 애들레이드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비컴을 마운드에 올렸다. 호주리그 최초로 여성 선수가 출전하는 순간이었다. 왼손투수인 비컴은 최고 시속 84마일(135㎞)의 패스트볼과 커브를 던졌다. 제구가 다소 흔들리며 볼넷을 주긴 했지만 안타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2사 1, 2루에서 뜬공을 유도해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했다. 비컴은 16세 이하 호주 야구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2019 호주 청소년 야구 선수권에도 출전했다. 야구는 성별 구분이 없는 종목이다. 하지만 신체적 능력 차이 때문에 여자 선수가 프로 팀 레벨에서 활약한 사례는 없다. 메이저리그, 일본, 한국 모두 아직까지 금녀의 리그로 남아 있다. 한국에선 미국 여자 대표팀에 발탁됐던 재미동포 출신 제인 어가 프로야구 구단 테스트를 받고, 독립구단에서 뛰기도 했지만 결국 프로 선수로 데뷔하진 못했다.


    이슬람 국가 파키스탄에서는 보수적인 법조계 인사들의 반대 속에 첫 여성 대법관이 탄생해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아리프 알비 파키스탄 대통령은 지난주 라호르 고등법원의 아예샤 말리크 판사를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임기는 10년이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말리크 판사는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2012년부터 라호르 고등법원의 판사로 일했다. 지난해 6월에는 성범죄 피해자의 성기를 직접 조사하는 검사 제도에 대해 '불법이며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왜곡된 종교 신념으로 인해 보수적 여성관이 사회 곳곳을 지배하는 것으로 알려진 나라이기 때문에 말리크 판사가 대법관에 취임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말리크 판사의 대법관 임명이 승인되자 보수적인 변호사와 일부 법관 등 법조계 상당수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세계경제포럼(WEF)이 성별 격차를 지수화한 성격차 지수(GGI·Gender Gap Index)에서 지난해 156개 나라 가운데 153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차별이 심각한 나라로 꼽힌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해마다 1천명에 가까운 여성이 '명예살인'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산된다. 명예살인은 다른 종파나 계급의 이성과 사귀거나 개방적인 행동을 한 여성이 가족 구성원에 의해 목숨을 잃는 일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그녀의 취임은 인권 운동가들로부터 “유리 천장이 깨졌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남미 온두라스에서는 지난주 시오마라 카스트로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온두라스의 첫 여성 대통령이자, 중앙아메리카의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이다. 카스트로 대통령은 2009년 쿠데타로 축출된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부정부패 척결과 빈곤 해결을 약속하며 12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물론 그녀의 행보에도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 대통령 자리에 앉기도 전에 국회의장 선출 문제로 집권당의 분열을 맞닥뜨리면서 험로가 예상되고 있지만, 시민들은 첫 여성 대통령의 탄생에 기대를 품고 있다. 그의 등극은 많은 나라에 존재하는 가부장적 문화를 넘어 여성도 공직에 오르고 다양한 직업과 직위를 가질 능력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어서 주변 국가의 여성 국민들에게도 희망을 심어주었다.


    지난해 말에는 176년 뉴욕 경찰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경찰국장이 탄생했다. 그것도 흑인 여성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에릭 애덤스 뉴욕 시장은 뉴욕 퀸스 자치구 롱아일랜드시티에서 키천트 시웰 신임 뉴욕 경찰국장을 임명했다. 그는 뉴욕 시장 선거에서 여성을 경찰국장으로 임명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로써 시웰은 벤자민 워드와 리 브라운에 이어 흑인으로서는 3번째로 뉴욕 경찰국장을 맡게 됐다.


    파리와 빈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 하우스로 꼽히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 감독이 지휘한 무대가 펼쳐졌다. 지난달 전임 남성 감독이 코로나19에 걸리며 대체 투입된 것이지만, 여성 음악가들에겐 고무적인 일이다. 많게는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의 오페라 극장들 대부분은 그동안 ‘금녀의 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도 첫 여성 감독이 탄생했다. 지난달 뉴욕 양키스 산하로 싱글A 팀인 탬파 타폰스는 최근 신임 감독으로 레이철 볼코벡을 선임했다. 메이저리그 팀 산하 마이너리그에서 여자 감독이 선임된 것은 볼코벡이 처음이다. 뉴욕 양키스는 2019년 11월 볼코벡을 마이너리그 팀 타격 코치로 지명해 선수 지도를 맡겼다. 볼코벡은 지난해 메이저리그 올스타게임 기간 중 열린 2021 퓨처스 게임에서 아메리칸리그 팀의 타격 코치를 맡기도 했다. 볼코벡 신임 감독은 2012년부터 야구계에 발을 들였다. 그 해 내셔널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에서 체력과 컨디셔닝 코치를 임시로 맡았고, 2년간의 노력 끝에 구단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 이후 네덜란드로 건너가 두 번째 석사 학위를 위해 공부하며 네덜란드 야구와 소프트볼 대표팀에서 타격 보조코치를 맡기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볼코벡은 뉴욕 양키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끝에 결국 양키스행을 결정했다. 또, 올해 초 미국 메이저리그 최초로 흑인 여성 코치도 탄생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올해 초 비앙카 스미스를 마이너리그 코치로 선임했다. 만 29세의 젊은 여성인 스미스는 플로리다주 포트마이어스에 있는 보스턴에서 야수들을 가르치는 코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새해 벽두부터 세계 곳곳에서 금녀의 벽이 허물어진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반갑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성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나누는 건 온당치 않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는 보이지 않는 벽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성의 활동에 결코 제한적이지 않을 것 같던 미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차별은 존재해 왔다. 이들처럼 최초로 선택된 자들은 그 분야의 개척자이다. 그리고 더 많은 노력을 해서 일구어낸 결과임을 알기에, 더이상 성별로 차별받는 세상에 살지 않길 바라며, 동시에 이런 일들이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지는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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