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과 구국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 등 온갖 난관속에서도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멸사봉공(滅私奉公)한 화신이다. 이런 강인함을 지닌 이순신 뒤에는 대쪽같이 강직한 어머니가 계셨다.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서 떠나보낸 초계 변씨는 셋째 아들인 충무공을 홀로 뒷바라지하며 최고의 명장으로 키워냈다.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자식을 위해 불굴의 터전을 만든 변씨가 없었다면,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을 그녀가 길러내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조선은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지난달 한국에서 발간된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의 저자는  "한 사람의 탁월한 자식 사랑이 위대한 영웅을 탄생케 했다"며 "우리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만큼 지혜롭고 위대하며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역사적 인물은 찾아낼 수 없을 것"이라며 변씨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또 한 명의 위대한 어머니를 꼽자면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5만원권 지폐에 그려진 신사임당은 그림과 시 등 예술적인 면모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였고 인품도 훌륭해 단순하게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고 표현하기엔 아쉬움이 남지만, 이 시대의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가장 좋은 어머니 상이다. 그녀는 자식들 교육에 부단히 애를 썼다. 보람 있게도 아들 넷과 딸 셋 모두 훌륭하게 자라서 첫째 딸과 막내 아들은 그림과 시·글쓰기에 능했고, 셋째 아들 율곡은 과거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다. 특히 율곡 이이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성장해 이름도 날리고 존경도 받고 있다. 신사임당은 어머니로서 자녀를 교육 시킬 때 위인의 행실을 들려주어 본받게 하고, 꾸짖을 때는 가장 엄한 어머니였으며, 또한 자녀에게 사람다운 행실을 갖출 것을 교육했다. 그녀는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여성 차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아름다운 여성이자 어머니였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 링컨은 황무지 개척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두 자녀의 어머니로서 척박한 자연 환경과 싸우며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뎌냈다. 그녀의 삶은 하루 종일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아들 링컨의 마음 속에 신앙과 꿈을 심어 주고자, 식사 후엔 찬송가를 불러주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때로는 분주한 대도시의 이야기도 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링컨이 10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고 그때 남긴 유언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사랑하는 에이브야! 이 성경책은 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내가 여러 번 읽어 많이 낡았지만 우리 집안의 값진 보물이란다. 나는 너에게 100 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성경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다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링컨은 어렸지만, 어머니의 유언을 따랐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영웅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항상 존재했다.  


    한국 역사의 흐름에는 양대 산맥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요, 또 하나는 어머니이다. 가부장적 전통사회에서 남성의 역할이 역사의 기록에 부각됐지만 역사는 앞에서 이끄는 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강인한 심지와 영민한 지혜로 수레바퀴가 됐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개인보다 사회와 국가를 향한 애국심으로 정신무장을 시키고, 분노와 절망보다는 희망으로 상생의 리더십을 발휘한 어머니들의 지혜와 힘이 빛나는 오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위의 분들과 비교는 안 되겠지만, 필자 또한 어느새 두 아들의 엄마가 되었다. 큰아이를 낳을 때 엄마가 오지 않았다면 필자는 미국생활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심장에 문제가 있던 큰아이가 퇴원해서 안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그렇게 석달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 엄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이들의 옷과 양말, 내의, 때밀이 수건, 행주, 프라이팬, 사위를 위한 홍삼정들을 바리바리 싸서 보내주셨다. 대학 다닐 때도 그랬다. 한달에 한번씩은 기숙사에 와서 청소며 빨래며, 철마다 이불도 바꿔 주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을 하는 동안 대여섯번 정도 이사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가장 힘이 들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올 때마다 어찌나 일을 많이 하고 집으로 내려가시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필자는 못된 딸이 확실하다. 서울 딸네 집에 오면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곳에 구경도 다녀야 하는데 매번 침대 옮기고, 책상 바꾸고, 빨래하면서 가정부가 따로 없었다. 이처럼 엄마는 평생 깐깐한 공무원 아내였지만 정말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도 같았다. 


    그러나 세상의 딸들은 평생 자식과 남편에게 헌신하는 엄마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좀더 당당하고 멋지게 살아야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10년을 매일같이 도시락 10개를 싸야 했던 엄마를 봐왔기에, 필자 또한 아이들과 남편의 도시락과 방과 후 간식 외에도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준비하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그렇게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어하는 딸을 위해 아빠와의 전쟁을 불사하고 서울의 학력고사장까지 데려다 준 엄마를 떠올리면서, 필자 또한 결국 아들이 그렇게도 원하는 대학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머니, 언제 불러도 가슴 찡하고 그리운 이름이다. 자식은 어머니를 때로는 투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무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감히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와 상관없이 끝없이 사랑을 베푸는 우리의 어머니, 당신의 한없이 넓고 깊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길. 그리고 이제부터는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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