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린 기자의 행복찾기

    요즘은 거의 매일 비가 내리는 것 같다. 반가운 일이다. 건조하기로 악명높은 콜로라도가 여름 끝자락에 접어들면서, 저녁마다 잔잔바리나마 비를 뿌려대니 말이다.처음에 콜로라도로 이사 와서 깜짝 놀란 것이 있다. 바로 비의 온도다. 여름에 내리는 비인데도 얼음장같이 차가운 온도에 저절로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한국의 여름 소나기는 이렇게까지 차갑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차가운 온도의 비가 내리는 것일까? 이유는 강수 입자, 즉 빗방울의 상태 때문이다. 기상학적으로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구름은 수많은 빙정핵, 즉 얼음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얼음 입자들은 공기 중 수분을 계속해서 흡수하며 점점 커지다가 더 이상 떠있을 수 없을 만큼 덩치가 커지게 되면 지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과정에서 얼음입자들은 더운 기층을 통과하면서 녹으면서 빗방울로 바뀐다. 하지만 영하의 기층을 통과하거나 낙하 도중 강한 상승기류를 만나 다시 상승하거나 하면 얼어붙어 결국 우박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게 된다.   콜로라도의 경우, 록키산맥이 지나가고 워낙 고지대이다 보니 하늘의 온도가 매우 차갑다. 그래서 얼음 입자들이 이 추운 대기권을 통과해 내리면서 충분히 데워지지 못한 상태로 지상과 조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얼음물 비가 내리는 것이다.


    반면, 플로리다 같은 열대 지역의 경우, 그만큼 해발 고도가 낮기 때문에 얼음입자들이 떨어져 내리면서 따뜻한 기층을 충분히 통과하면서 온도도 상승하기 때문에 뜨뜻한 비가 내린다. 2년 전에 플로리다 여행을 갔을 때 갑자기 국지성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콜로라도에서 두들겨 맞던 얼음장같은 비가 생각나 급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내 맨 팔에 떨어져 내리는 비의 온도가 너무 쾌적한 거다. 열대의 후덥지근한 플로리다의 한낮의 뜨거운 온도에 지친 내게 플로리다의 소나기는 말 그대로 단비였다. 얼마나 기분 좋은 온도인지, 나는 뛰는 것을 멈추고 홀린 듯 열대 정글의 숲을 올려다보며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다 맞았다. 15분 정도 쏟아붓던 비는 어느새 말끔히 그치고 나무들은 똑똑 빗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비라는 것이 이렇게 반가왔던 존재였던가.


    한국에 살 때 장마철만 되면 꿉꿉하고 눅눅해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우산을 쓰고 나가도 버스를 기다리고 군데군데 고인 빗물로 철벙거리는 인도를 걷다 보면 어느새 바짓 단과 구두는 흠뻑 젖어버리고,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고인 버스에 올라타면 혹시라도 쫄딱 미끄러져 개망신을 당할까 봐 조심조심 걸어야 했다.  비만 오면 일하러 나가기도 싫을 정도로 한국에서 비는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비는 내게 늘 그런 존재였던 것은 아니었다.  


    내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비는 주변 풍경을 순식간에 바꾸어주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름비가 더 그랬다. 자글자글한 여름 뙤약볕에 지쳐갈 무렵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쏴아 하면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 집 앞에 보이는 짙푸른 여름산은 순식간에 어둑한 반투명 커튼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 말갛게 개인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었지만, 바싹 마른 집 앞 도랑에는 시원하게 물이 흘러가고 있었고, 주변 논밭의 농작물들은 한층 생기를 머금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강물은 순식간에 불어났고, 여기저기 생긴 물웅덩이는 찰방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해도 신이 났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비는 성가신 존재로 바뀌어 가는가 싶더니, 콜로라도로 이사 와서 비가 귀해지니 비가 오면 텃밭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되니 반가웠다. 나이가 들어가면 고정관념도 변하는가 보다. 비 하나에도 이렇게 널뛰듯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니, 나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도 비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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