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가 썩을 대로 썩은 19세기 중반을 다루고 있는 MBC <짝패>. 이 드라마의 주인공 천둥(천정명 분)은 요즘 '아래'라는 의적 조직에 서서히 빠져들고 있다. <짝패>의 시대적 배경인 19세기 중반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 살았던 조선의 서민들도 역시 천둥처럼 '아래'라는 의적을 실제로 동경했다. 드라마 속의 '아래'는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나 로빈훗처럼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민담 속의 '아래'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개인 의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의적의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민담 속의 개인 의적으로 추앙받으려면, 단순히 권력층이나 부유층의 돈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외에도 추가적인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자신만의 흔적이나 징표를 남기는 것이다.  <어수신화> 속의 '아래'는 신출귀몰한 도둑이었다. 그를 잡아달라는 탄원서가 하루가 멀다 하고 포도청에 접수될 정도였다. 그의 행동 패턴을 보면, 그는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신출귀몰의 신화를 이어나갔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말처럼, 그러던 그가 어쩌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한껏 고무된 포도대장은 "사형까지 몰고 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옥에 갇힌 '아래'는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옥을 지키는 포졸을 매수했다. 어느 산, 어느 골짜기, 몇 번째 소나무 밑에 300냥을 감춰뒀으니 필요하면 갖다 쓰라고 말한 것이다.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이 3냥이었으니 300냥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긴가민가하고 그곳에 가본 포졸. 소나무 밑에는 정말로 거액의 돈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아래'를 신뢰하게 된 그는 포도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아래'에게 죄다 알려주었다.

 얼마 후, 포졸은 '내일, 포도대장이 아래를 심판한 뒤 사형에 처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해서 '아래'에게 귀띔해 주었다. 그러자 '아래'가 청탁을 했다. "나를 잠깐만 풀어주면, 통행금지 해제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아래'와 친한 데다가 거금까지 받은 포졸로서는 부탁을 거절할 길이 없었다. '도망갈 사람은 아니야!'라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옥문을 열어주었다.  정말로 '아래'는 새벽 4시경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포도대장의 주관으로 열린 심판에서 그는 곤장을 맞고 석방되었다. 포도대장은 그가 '아래'가 아니라고 판정을 내렸다. 흔한 잡범 중 하나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아래'였다. 그렇다면, 포도대장이 풀어준 이유는 무엇일까?  포졸의 도움으로 유치장을 잠시 빠져나온 '아래'는 그 길로 포도대장 집으로 향했다. 그 집 침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방문을 열어 보니, 포도대장 부부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의적 '아래'가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제 제시된다. 옷을 홀딱 벗고 부부 사이에 드러누운 '아래'는 두 사람을 옆으로 밀어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부자리에 '我來'를 써놓고 유치장으로 돌아왔다. 평소에 늘 하던 대로 글씨를 남겨놓고 현장을 떠난 것이다. 그가 항상 '조금은 늦게' 현장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가 '아래'로 불리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보고 깜짝 놀란 포도대장은 '아래'가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출근한 그는 "쟤는 아니야!"라며 곤장 몇 대 때리는 선에서 '아래'를 풀어주었다.

 현장에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아래'의 특성은, '개인 의적'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쾌걸 조로는 알파벳 Z자를 남겼고, 일지매(一枝梅)는 매화 한 가지를 그려놓은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사회 전체에 경각심을 주고 서민층에게 희망을 주려면 그런 표지를 남기는 일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사건현장을 신속히 빠져나가도 힘든 판국에, 그림이나 글귀를 남기는 낭만과 여유 때문에 독자들은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권력층이나 부유층의 재물을 빼앗아 서민층에게 나눠주는 행위 못지않게, 공권력을 비웃으며 "나 잡아보라"며 일부러 흔적을 남기는 행위가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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