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하고 싶고, 되고 싶고, 갖고 싶고, 가고 싶은 열망이 하나 쯤은 있을 법하다. 흔히 말하는 버킷리스트 말이다. 원래 버킷리스트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을 말하는데, 지금은 살아있는 사람들도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적용되는 말로 그 의미가 포괄적으로 되었다. 2022년 새해벽두에 필자가 다짐했던 소망은 이 버킷리스트 중 하나쯤은 올해 안으로 꼭 이루고 말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50살의 생일전에 마추픽추를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름부터 페루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고, 마침내 다녀왔다.마추픽추, 말만 들어도 설레는 그곳은 해발 2430미터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마을로 잉카제국이 멸망하기 전 형성되었다는 사실 외엔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가 없는 터라 더욱 신비로운 곳이다. 아래쪽에서 잘 보이지 않아 ‘잃어버린 공중 도시’라는 별칭이 붙은 마추픽추, 수레바퀴 없이 이런 고지대에 어떻게 이런 도시를 건설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렇기에 마추픽추는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신세계 7대 불가사의에 모두 뽑히기도 했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마추픽추로 가기 위해 쿠스코라는 도시로 출발했다. 마추픽추를 가기 위한 관문인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상징적인 도시다. 하지만 생각보다 가난했다.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 한국전쟁 직후의 흑백 사진을 보는 듯한 전경이 펼쳐졌다. 도로는 군데군데 비포장도로여서 우기인 겨울에는 진흙탕 길이 예사였다. 도로 주변에 늘어서 있는 주택과 상가의 너덜너덜한 간판과 지저분한 낙서는 빠질 수 없는 전경이었다. 대부분의 가구는 가난한 시절의 시그니처인 쓸레트 지붕이 덕지덕지 지저분하게 붙어있었다. 그러나 모레면 마추픽추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이런 전경들까지도 털털한 나라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너그럽게 보듬었다. 쿠스코에서 하루를 묵고 마추픽추의 도시인 아구아스깔리엔떼스 라는 도시로 가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열차를 탔다. 열차 또한 유럽이나 알레스카의 관광 열차와 비교해봤을 때 그다지 럭셔리하지도 않았고, 필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위생상태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내일이면 마추픽추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이 모든 불만들을 내려놓게 만들었다.


    아구아스깔리엔떼스 역에 도착했다. 아구아스깔리엔떼는 스페인어로 ‘따뜻한 물’이라는 뜻이다. 페루레일의 종점이자 마추픽추로 향하는 여행자들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을이다. 여기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대략 20분 정도 오르면, 마추픽추와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곳 또한 첫 눈에 들어온 전경은 당황스러웠다. 깊고 웅장한 산세만을 기대했던 필자의 눈 앞에는 쓰러져가는 집들의 지붕 위에 휘날리고 있는 빨래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세계적인 유적지의 관문치고는 다소 허접했지만, 이또한 이제 곧 마추픽추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묻혀버렸다. 


    마추픽추를 오를 생각에 밤새 뒤척거렸다. 새벽 2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새벽 4시 창밖으로 여전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깐 잠이 들어 6시에 눈을 떴을 때 비로소 비가 그친 것 같았다. 9시 호텔을 나서 마추픽추로 가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 하늘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추픽추에 도착했을 때는 더없이 맑고 쾌청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마추픽추를 돌아보는 3시간은 마치 하늘이 필자에게 허락한 시간처럼 느껴졌을 정도의 절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50년 인생을 아낌없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마추픽추를 배경으로한 수많은 사진들을 봤지만, 필자의 사진만큼이나 파한 하늘과 하얀 구름이 선명한 사진은 본 적이 없다. 하늘이 허락해 준 이 시간에 감사했고, 마추픽추에 서 있는 것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렇게 마추픽추를 보고, 다음날 와이나픽추 등반을 나섰다. 등반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제한되어 있어 미리 티켓을 예매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험준한 산세로 등반자체가 힘들다고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뿐하게 등반에 성공했고, 와이나픽추에서 바라보는 마추픽추를 감상할 수 있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리고 다시 열차를 타고 쿠스코로 돌아와 시티투어를 마치고, 호텔에서 볼리비아 여행 일정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갑가기 쿠스코 공항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전 대통령이 체포된 뒤 전국적으로 시위가 벌어져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고 한다. 시위대들은 쿠스코 광장을 중심으로 시위를 이어갔다. 그렇게 5일간 고립된 관광객은 5천명에 이른다. 잠깐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그러나 탄핵당한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는 공항과 도로를 점거했지만, 관광객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다. 우리는 시위대 속에 뭍혀 현장취재를 허락받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공항이 폐쇄된 다음날 쿠스코 소재 미국 영사관을 찾아가 현지 사정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을 듣고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우리는 빡빡하게 짠 볼리비아 일정을 미련없이 포기했고, 쿠스코를 더 보기로 결정했다. 유럽의 5성급 호텔만큼이나 맛있게 차려진 호텔의 아침식사를 먹고 난 뒤 여유롭게 코카 티를 마시면 점심때가 되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마사지를 받고, 또 저녁을 먹고 디저트까지 챙겨 먹으면 8시쯤이 되었다. 이렇게해서 우리는 쿠스코에 고립되어 있었던 4일동안 쿠스코에 소재한 많은 맛집을 섭렵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온전히 쉴 수 있었던 여행도 드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먹고 자고 노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필자의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였는데, 시위 덕분에 이것도 해 본 셈이 되었다.


     쿠스코에서 만난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버킷리스트는 미국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버킷리스트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발걸음이 더욱 활기차졌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그속에서 또 다른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2022년이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 이루지 못한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내년에는 꼭 도전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올해 이루지못한 아쉬움은 내년에 더 큰 기대감으로 다가올 것이기에, 후회 없이 2022년을 마무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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