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선교사 임동섭 목사

    저는 에콰도르 선교사입니다. 에콰도르에 신학대학원을 세웠습니다. 에콰도르 사람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천국에 가는 길을 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이 땅에서 기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돕는 길 중에 좋은 방법이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육 중에서도 최고의 교육은‘신학교육’이라고 보았습니다. 남미에서 신학대학을 운영하시는 분들에게 무엇이 가장 힘드시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모두 신학생 유치가 어렵다고 답변하셨습니다. 제가 처음 신학대학원을 시작할 때에는 학비가 저렴하면 많이 입학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경제적인 보장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에콰도르에 먼저 오셔서 어린이 사역을 하고 계신 선교사님은 커피 전문가입니다. 이 선교사님은 자립 선교를 꿈꾸셨습니다. 커피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사고, 현지인들에게 농사법을 알려주면, 자립선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땅을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1헥타르(가로100m x 세로100m) 당 20,000불정도 이었습니다. 몇 명이 10헥타르 땅을 사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커피나무를 심으면 보통 4년 후부터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작을 주면 4년까지는 수입이 없지만 그 후부터는 수입이 발생합니다. 커피를 수확하면 소작농이 지주에게 보통 땅값의 25-30%를 소작료를 지불한다고 합니다. 이 선교사님은 땅값의 20%만 소작료를 받으면 소작농이 좋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헥타르 당 연 수입 4,000불이면 한 사람의 연봉이 됩니다. 또한 소작농은 일자리가 생기니 얼마나 좋은 방법이냐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커피 농장 소유주들은 대부분 100헥타르 이상의 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농장주들은 10헥타르 정도의 땅은 너무 작기 때문에 등기해 줄 수는 없지만 서로 믿고 구두 계약을 하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커피 농사를 포기했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이 송이버섯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곳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에콰도르 중앙에 있는 높은 산을 찾아갔습니다. 울창한 소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소나무 숲 속에 들어가 보니 과연 버섯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이버섯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자립선교에 대한 방안을 검토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에 오신 선교사님들은 장학금으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만 학비를 철저하게 받았다고 합니다. 유명한 부흥강사였던 한 목사님은 졸업시험에는 합격했지만 학비를 내지 못해 학비를 다 낸 후 동기생들보다 2년 늦게 졸업한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장기적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학교의 운영을 후원금으로 단기간은 운영할 수 있겠지만 학비만으로 자립하지 못한다면 결국 학교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학비를 저렴하게 책정했습니다. 이 학생들이 졸업하면 이 분들을 교수요원으로 임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저렴한 학비로 공부했으니 강사비도 저렴하게 받도록 설득하면 신학대학원이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학사과정은 학점 당 3불, 석사과정은 5불, 박사과정은 20불로 학비를 책정했습니다. 강사비는 한 과목당 120불로 책정했습니다. 총 6분이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 분들을 2022년 5월에 교수로 임명했습니다.


   우리말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뭔가 값어치 있는 것을 줄 때 이런 행위를 ‘기부한다!’라고 합니다. 이에 상응하는 영어 단어로는 ‘채러티’(charity) 혹은 ‘필란트로피’(philanthropy)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채러티(자선)’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대함,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동정심과 같이 개인적인 차원의 관심과 자비심에 근거한 행위를 말합니다. 자선은 가난한 사람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든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또 다른 부정적 평가는 자선이 빈곤의 원인이나 이에 대한 장기적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필란트로피’(philanthropy)는 ‘박애주의(博愛主義)’ 또는 ‘인간애(人間愛)’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필란트로피’는 그리스어로 친구를 뜻하는 ‘필로(philo)’에서 유래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인류에 대한 사랑’, 혹은 ‘지역사회를 돌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보다는 조직화된 기구에 돈을 기부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채러티가 개인적 차원의 소위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는 감성적 성격이 강하다고 한다면, 필란트로피란 이런 감성을 갖고 사회적, 구조적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삶의 질의 향상, 사회적 약자 및 소외 계층을 위한 적극적인 기부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용어는 ‘자조’(自助, self-help)와 ‘기회창출’(opportunity creation)이라는 원칙, 그리고 절망과 빈곤의 근본적 원인의 제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부한다고 할 때 ‘돈’이나 ‘물질(Treasure)’로 기부하는 것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Time)과 재능(Talent)으로도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로 인해 우리 사회는 더 잘 돌아가고 좋은 사회가 될 것입니다. 정부와 기업이 해결하지 못한 틈을 비영리단체와 ‘필란트로피스트’들이 채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선행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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