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아들이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가는데 같이 갔다. 테스트를 무사히 치르고 면허증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대기했다. 우리 차례가 되었고, 운전국 직원은 사진을 찍기 전 면허증에 기재될 몇 가지 사항들을 물어보았다. 키, 몸무게, 눈색깔, 머리카락 색깔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고 대답도 자신있게 술술 잘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장기 기증 여부를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고작 15살인 아들에게는 너무 낯선 질문이어서 어리둥절해 즉각 대답할 리는 만무했지만, 필자 또한 솔직히 순간 머뭇거렸다.  


     필자의 남편은 지난달 간이식을 한 지 5년이 되었다. 의사는 이식 후에 5년이 지나면 부작용 가능성이 거의 없는, 완치의 수준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남편은 이식 전 병원으로부터 4통의 전화를 받았다. 앞의 세 번의 경우는 기증자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식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지막 네 번째 기증 희망자로부터 이식을 받았다.  이식 대기자 명단에 합류한 지 3개월 만에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불의의 사고로 의식회복이 불가능할 경우 장기 기증을 자원한 도너들이 예상 외로 많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미국보다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 이유를 굳이 찾자면, 한국은 예로부터 유교 사상이 뿌리박혀 시신을 훼손하면 불효라고 믿는 유가족이 많다. 특히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는 공자 말씀이 중고등학교 윤리와 한자시간에 자주 나오다 보니 지금까지도 그 말씀을 명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신체발부는 몸과 피부, 머리카락을 일컬으니 온 몸을 지칭하는 것이다. 즉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다치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런 말씀의 영향 때문인지, 문신도 금기시해 왔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필자의 첫 미국 운전면허증에도 장기 기증을 허락하는 하트 문양이 없다. 부모와 가족의 허락 없이 필자의 마음대로 장기 기증을 결정한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고, 그리고 장기 기증이라는 단어에 오래전부터 거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20여 년을 살다 보니 타인을 배려하고 공익을 위하는 미국인들의 태도에 감탄하는 일이 종종 생기게 됐다. 한인 입양아 캠프를 갔을 때 눈 색깔이 다른 부모가 지극한 정성으로 입양아를 돌보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장애인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에서 상대방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반대편 차선에서 사고차량을 보고 유턴까지 해서 괜찮은지를 물어보는 운전자를 보면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필자는 남편이 큰 혜택을 받았으니 그 사회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전 뉴욕에서 갑작스러운 뇌사판정을 받은 50대 한인여성이 3명에게 장기를 기증해 새 생명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진한 감동을 안겨준 이 여성은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치료할 만한 의료 장비가 마땅치 않았고, 한참 후에야 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뇌사 판정을 받고 회생하지 못했다. 애초 9명에게 장기기증을 할 계획이었지만 입원 중 약물 치료를 받은 영향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3명이 이식 혜택을 받았다. 가족들은 의료진이 생존 가망성이 희박하다며 장기 기증 의사를 타진해왔을 때 처음에는 그저 황망하기만 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평소에도 어려운 사람들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도와주려고 애써온 고인의 생전 삶을 생각할 때 자신으로 인해 새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고인도 뜻을 함께 할 것이라고 믿고 장기 기증에 어렵사리 동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비록 사랑하는 엄마와 아내였던 고인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흔적이 세상 어딘가에서 새로운 희망으로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했다.


    인체 조직의 경우, 기증자 한 명당 최대 100명을 살릴 수 있다. 이미 최수종, 하희라 부부와 같은 유명 연예인들도 인체조직 기증서에 사인했다는 뉴스를 오래 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화상 환자는 피부를, 다리 저는 환자는 뼈, 연골, 인대를, 시각장애인은 망막을, 심장 질환자는 심장판막을 이식받아 새 삶을 살 수 있다. 기증자가 사망한 후 15시간 이내에 피부, 뼈, 연골, 인대, 건, 혈관, 심장판막 등을 구득한다. 인체 조직은 길게는 5년까지 이식재로 사용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인체 조직 및 장기 등 인체 유래물은 가급적 자국 내에서 자급자족할 것을 권고한다. 각국 내 인체 조직 기증량이 많아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인체 조직 기증 상황은 열악하다. 


     필자도 뼈 속까지 한국인인 탓인지,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깊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을 비롯해 장기를 기증받아 새 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장기 기증은 생명의 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깨닫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면허증에 새겨질 하트 모양에 잠시나마 주저했던 것을 반성한다. 결국 지금 필자와 아들의 운전면허증에는 하트 모양이 새겨졌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한 행복한 삶처럼 필자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당신만 울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당신 혼자 미소 짓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울도록 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