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학교에서는 한국에서 접하지 못했던 이벤트들이 자주 열린다. 특히 초등학교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행사 공지문을 보낼 정도로 다양한 행사들이 열린다. 그때마다 교사들은 파티 준비물 리스트가 적힌 링크를 학부모들에게 보내고, 학부모들은 접시, 포크, 컵, 냅킨, 과일, 사탕, 과자 등 본인들이 준비하고 싶은 항목에 표시를 하고 시간에 맞춰 교실로 가지고 간다.


    우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조부모의 날(Grandparent’s day) 파티가 있다. 대부분 9월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날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녀들 세대의 교육과 안녕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것을 기념하고 인정하는 날이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학교 교실에 와서 함께 이야기하고, 간식을 먹으면서 손자 손녀들과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는 학생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참석을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처럼 한국에 살고 있거나 타주에 살고 있으면 이날 하루 행사 때문에 콜로라도로 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런 파티는 아이들의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 수 있다. 이처럼 모든 학생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벤트는 초등학교 5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열렸다. 그때마다 우리 아이들은 멀뚱멀뚱 교실에 앉아서 마치 남의 파티에 들러리를 서는 기분이었던 같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감사를 집에서 하면 될 것을 학교에까지 불러서 이런 번거로운 행사를 왜 해야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한국의 학교에서 보기 힘든 또 하나의 행사가 군인의 날(Veteran's day) 파티이다. 이 날은 군대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지정된 국가 공휴일인데, 이 시기를 전후해 학교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한국에서는 서울 광화문 광장이나 각 부대에서 치러지는 공식적인 군인의 날 행사가 이곳 미국에서는 각 학교에서 다른 방식으로 열린다. 편지를 쓰는가 하면,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또, 가족 중에 군인이 있으면 학교로 초청해 그들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간식을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여기서도 가족 중에 군인을 초청한 학생들은 덩달아 스타가 되곤 한다. 초청된 군인 가족들은 성조기가 그려진 모자나 티셔츠를 입고, 전교생 앞으로 나가 손을 흔들고 박수를 받는다. 미국은 퇴역 군인을 포함한 모든 군인에 대한 예우가 남다른 국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족 중에 군인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 날의 학교 파티는 그다지 달갑지 않다.  그러나 이 또한 학교에서 매년 하는 중요한 행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한국에서 접해보지 못한 이런 교내 파티 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사실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 파티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군인은 자녀세대와 국가에 귀감이 되는 대상이기 때문에 학교에서 공식적인 일정으로 챙기는 것은 있을 수 있겠다 싶은데, 발렌타인 데이를 공식 일정으로 분류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2월14일 성 발렌타인 데이는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다. 참고로 여성이 남성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라는 식의 발상은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추후 일본의 마케팅 전략으로 인해 초콜릿을 주는 날로 인식되었다. 기원은 3세기경 로마시대, 당시 결혼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없이는 할 수 없었는데,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황제의 허락없이 비밀리에 결혼을 시켜준 죄로 맞아 순교한 사제, 발렌티노 주교의 이름을 따 그의 시신이 매장되어 땅으로 돌아가게 된 2월14일을 성 발렌티노 축일로 정하고 해마다 연인끼리 사랑의 선물이나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풍습이 생겼다는 게 발렌타인 데이의 기원이다. 이 날 여성이 남성에게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로 초콜릿을 이용했는데, 그것은 초콜릿의 달콤함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이 유래는 18세기 어느 영국 인이 꾸며낸 이야기이며, 이를 이용해 제과회사들이 상업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이런저런 기원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곳 미국에서는 2월14일,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같은 반 친구들의 수만큼 초콜릿을 준비해 학교에서 파티를 연다. 이는 담임 선생님의 주재아래 학부모의 참여를 독려하는 엄연한 교내 공식 일정이다. 큰 아들이 처음 학교에서 발렌타인 데이 파티를 준비해야 한다면서 초콜릿을 사야한다고 했을 때, 나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속는 셈 치고 킹수퍼스에서 조그만 초콜릿 27개를 사서 학교에 갔다. 그런데 막상 학교를 가니 필자가 준비한 초콜릿은 너무 초라했다. 작은 봉지에 색색깔의 초콜릿과 사탕을 담아 리본까지 묶어서 가지고 온 학부형들이 대부분이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 발렌타인 데이 파티가 학교에서 열리는 이벤트 중 가장 많은 학부모가 참석하는 파티라는 점이었다. 필자는 별 것도 아닌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만들어내는 미국 교육 시스템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매년 열리는 이러한 행사들로 인해, 아이들은 작은 것에도 진심을 담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쯤에서 기억해야 할 날이 있다. 다가오는 2월14일은 발렌타인 데이로 사랑을 전하는 달콤한 날이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씁쓸한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렌타인 데이와 같은 날이어서 기억하기가 쉽다. 그래서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하는 이 곳 학교 파티와 같이, 우리도 같은날 안중근 의사를 기억해주는 무언가를 하면 좋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예를 들면 그에 관한 일대기를 알리거나 기념관, 연구소, 하얼빈역, 여순감옥 등 숨겨진 추모지를 소개하면서 애국선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학교나 혹은 한인사회의 공식 행사 일정에 추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발렌타인 데이를 위한 초콜릿을 사면서 불쑥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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