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 수출 품목인 반도체가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의  가드레일(안전장치)에 막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 일명 칩스는 미국 기업에게는 지원법으로, 한국 기업에게는 장애물법으로 작용할 공산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은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이다. 이 두 기업은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으로 인해 직접적인 난관에 봉착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으로부터 조 단위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어 보이지만, 사실상 함정에 빠진 것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24년 가동을 목표로 170억 달러를 투자해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에 있으며, SK 하이닉스는 2023년 상반기 내 미국에 반도체 패키징 공장 착공을 추진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에 따르면 만일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으려면 향후 10년간 중국 등 반도체 우려 국가에서 반도체 생산 능력을 늘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이는 중국에 대한 투자 제한 조치라는 목적 외에도 미국 정부로부터 반도체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에 대해 미국의 군사용 반도체 공급 참여를 요구하고, 공장 건설 과정에서는 미국산 건축 자재 사용을 강제하고 있다. 또, 기업의 전망치를 뛰어넘는 초과 이익이 발생할 경우 이를 공유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을 포함해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실상 정부 개입형태를 보이고 있다. 초과 이익 공유를 위한 방책으로 미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에게 실적 전망이나 재정 계획 등 내부 기밀 정보를 제출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코드맞추기 식으로 미국 반도체 공급망에 참여하기 위해 수조원의 투자를 계획 중인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로서는 이런 반도체 지원법은 족쇄가 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이에 상응한 조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 미 상무부는 총 527억 달러를 지원하는 반도체 지원법 중 미국 내 반도체 생산기업에 대한 390억 달러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심사기준을 발표했다. 상무부가 발표한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보조금을 지원받는 반도체 기업은 주가를 올리기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지급 대상 기업을 선정할 때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또, 직원 채용시 대학 졸업자가 아니더라도 고등학교 졸업자 등을 지역사회와 협의해 10년간 10만명 이상의 새로운 기술자를 배출해야 한다. 그리고 1억5천만달러 이상의 지원금을 신청할 경우 공장 직원과 건설 노동자에게 보육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며, 기업의 초과 이익은 미국 반도체 업계를 강화하는데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중국과 같은 우려 국가에는 향후 10년간 반도체 생산 설비를 늘려서는 안되며, 이들 국가와 기술 라이선스를 의도적으로 공유하거나 공동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이 요구하는 반도체 투자 프로젝트가 미국의 특정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그동안 지급된 모든 보조금은 회수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 공급망 재구성이라는 명분아래 미국의 이익 우선주의에 끌려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천문학적인 돈을  미국에 투자하고도 대접은 커녕, 터무니 없는 보조금 심사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보조금 신청이 기업 이익 창출에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해도 미국 정책에 따라 보조금을 신청해야 한다며, 사실상 보조금 신청을 강제하고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한국 정부가 한미일 동맹을 위해 반도체 기업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주도로 미국에 반도체 투자를 결정했는데, 문제가 발생하자 뒷짐지고 구경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대로라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가  미국의 보조금을 받으려면 영업비밀 노출, 이익 환수, 기술 정보까지 내놓으라는 것은 글로벌 기준에 어긋나는 과도한 요구다. 특히 중국 관련 조항은 가장 큰 딜레마이다. 미국의 보조금 기준에 부합하려면 중국과 공동 연구나 기술 이전을 할 수 없고 생산량도 10년 동안 늘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중국에 추가 투자를 할 수 없게 돼 장기적으로 사업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반도체 수출의 55%를 중국 시장에 의존하는 우리로선 큰 타격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반도체 생산 설비를 중국에서 인도나 베트남으로 옮겨야 하겠지만, 이게 당장 쉬운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SK 하이닉스는 D램의 중국 생산 비중은 상당히 높다. 삼성과 SK는 중국 반도체 생산시설에 각각 누적 33조원, 25조원 이상을 투자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준한 설비 투자가 생산력과 연결되는 메모리 반도체의 특성상 중국으로 장비 반입이 차단된다면 기업의 미래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중국과 미국에 끼어서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만 죽을 맛이다.  
그러나 한국은 강하게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할 것 같다. 반도체 원천 기술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고, 반도체 외에도 미국이 한국을 압박할 수단은 많기 때문이다. 한국으로선 미국의 구상에 참여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 하지만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중국 반도체 시장을 잃고 민감한 기업 정보가 노출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국가 간 산업 전쟁이다.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 산업 질서를 재구축하고 게임의 룰을 바꾸려 하고 있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한국도 기업에만 맡겨 둘 상황이 아니다. 삼성과 SK의 반도체 사업은 한국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중요한 사업이다.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 미국의 과도한 반도체 지원법을 수정하는 데 외교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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