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언젠가 10살 정도 되는 어린 아이의 삶이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감탄하면서 화면을 살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여자 아이입니다. 집안 사정이 기가 막힙니다. 할아버지는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늘 누워 계십니다. 그런데 할머니와 엄마는 백만 명에 하나 있을까 하는 불치병을 앓고 있어서 점점 몸이 마비되어 가고 있어요.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어요. 아빠는 안 보여요. 그러니까 4식구가 사는 데 집안일을 10살짜리 어린이가 다 해야 해요. 물론 학교에 다닙니다. 학교가 끝나면, 즉시 집에 옵니다. 당장 빨래부터 합니다. 그 다음은 설거지입니다. 어른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쳐다만 봐요. 다행히도 복지관 직원이 이것 저것 도와 줘요. 그 다음날 10살짜리 어린 아이가 2년 동안 모은 저금통을 깨서 어른들 선물을 사는 장면이었습니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우고 마트엘 갑니다. 할아버지 것도 사고 할머니 것도 사요, 엄마 것은 젊었을 때 좋아하던 가수 씨디를 사 드려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기 것은 살 생각을 안해요. 그러면서 해해 웃어요. 좋아해요. 즐거워해요. 저는 눈물이 났어요. 혼자 질문했습니다.  “10살짜리 아이를 저렇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어리광도 피우고 놀기도 하고 내 꺼 부터 살 꺼야? 할텐데,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제가 내린 결론은 “고난”이었어요. 고난이 10살짜리 어린이를 저렇게 흐뭇한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는 종종 쉽게 살고 편하게 살기를 원하지요. 공부를 해도 평소에는 펑펑 놀다가 시험 볼 때, 잘 보는 비결은 없을까?  돈을 벌어도 고생하지 않고? 쉽게? 편하게? 날마다 컴퓨터 게임만 하고 나 재미있는 것만 하다 성공하는 비결은 없을까? 그런 건 없지요. 저도, 마찬가지지요. 그럭저럭 해도, 교회가 부흥했으면 하는데 그런 건 없는 거지요. 분명한 것은? 고난이 없으면 스토리가 없어요. 고난이 없으면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어요. 고난이 없으면 인생은 허무해져요. 고난이 인생을 너그럽게 만들어요. 고난이 겸손하게 만들어요. 고난이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없었다면 구원도 소망도 없지요. 그리스도 고난의 신비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노래하고 소망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특징은 자원하심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어요.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자원하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두 번째 특징은 대신하심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받은 우리가 힘써야할 것이 누군가를 대신해서 수고하고 희생하는 일이지요. 세 번째 특징은 모르고 가신 게 아니라 다 알고 가신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특징이지요. 그 고통과 그 모멸과 침뱉음을 다 알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부활의 영광임을 알고 가셨지요. 잊지말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사서하는 고난은 그 마지막이 부활의 영광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난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는 오직 참음의 표시이지요. 참지 않고서야 어떻게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 또 참아야 부활의 영광을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둘째는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입니다. 부끄러운 고난이지요. 깨끗하게 인정해야지요. 셋째는 선을 행하다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이지요. 잘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고난이지요. 바울 사도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순절 기간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기간이지요. 고난을 사는 거지요.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2:14-15) 주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 십자가로 이기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고 주를 따라갑니다. 

◆개미들의 희생
‘개미굴에 불이 나면 개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느 과학자가 어린애 같은 궁금함을 가졌습니다. 소화기가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물을 길어 올 수도 없을 것이고, 그 좁는 굴 속에서 그냥 자기들의 삶의 터전이 타 들어가는 불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을까? 개미는 사람과 닮은 구석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베르베르라는 분이 쓴 ‘개미’라는 소설이 재미있게 읽혔던 이유도 놈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사람 사는 세계와 너무 흡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개미들 사이에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 편하자고 다른 개미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놈들도 있고 어떤 놈은 아예 자기 굴 근처에 농장을 차려 놓고 하인 개미를 두고 부려 먹기까지 한다고 하니 알고 보면 우습지도 않은 놈들입니다. 그래도 개미하면 왠지 좋은 이미지가 느껴지는 것은 놈들의 부지런함 때문이겠지요. 어린애 같은 궁금증을 풀기 위해 과학자는 개미 굴 속에 아주 작은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과연 불이 났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를 관찰하기 위해서이지요.드디어 티끌같은 불똥을 개미 굴 속에 던졌습니다. 대상은 아마존에 서식하는 개미들이었습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집에 불이 났으니 야단이 난 겁니다. 그러나 개미들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불길을 가장 먼저 본 개미는 머뭇거림도 없이 즉각 자기 몸을 불길 속에 던졌다고 합니다. 도무지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을 알게 된 개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서 불길에 자기 몸을 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불길이 잡히고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불꽃에 내던져진 개미들의 몸은 불길에 타면서 묘한 액체로 변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액체가 불을 끌 수 있는 소화 물질이었던 것입니다. 나를 희생해서 우리 모두를 살리려는 본능이 개미들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내 몸을 던질 줄 아는 희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개미에게서 배울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우리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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