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중앙정보국(CIA)이 한국의 대통령 집무실을 도청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뿐만 아니라 프랑스, 이스라엘 등 동맹국들의 외교 안보라인을 도청했다는 정황이 담긴 문서들이 온라인상에 유출되면서, 미국의 신뢰도는 추락중이다. 이 문건들에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한 포탄 우회 제공 문제를 놓고 한국 국가안보실 고위 당국자들이 나눈 민감한 대화까지 담겼다고 한다. 이는 분명 70년 동맹국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써 양국의 신뢰를 정면으로 깨뜨리는 주권 침해이자 외교 반칙이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대통령실을 도·감청해온 것은‘오래된 비밀’이다.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 한국 인권문제 등을 두고 한국과 미국이 다투는 와중에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는 1면에 “서울이 미국 관리에게 수백만 달러를 줬다"는 보도를 했다.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박동선 등 로비스트를 통해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돈으로 매수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는데, 정보의 출처도 놀라웠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청와대를 도청해 이를 파악했다는 것이다. 얼마 뒤 뉴욕타임스는 ‘고성능 지향성 전파 탐지’를 이용해 유리창의 떨림 등으로 도청을 할 수 있다고 청와대 도청 방법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 도청을 피하려고 중요한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하지 않고 청와대 뜰을 거닐면서 했다. 청와대 도청 사실은 윌리엄 포터 전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서도 확인됐다. 포터 전 대사는 1978년 4월 한 미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청와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내가 부임하기 전에 그것(도청)이 중단됐다는 보고를 들었다”고 밝혔다. 2013년에도 미국이 주미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38개국의 재미 공관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국 국가안보국(NSA)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이 동맹국까지 감시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였다. 2016년에는 폭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가 ‘2008년 미 국가안보국이 당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대화를 도청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독일, 프랑스, 브라질 등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특히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는 2013년 벨기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친구 사이에 도청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공개 항의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은 미국의 도청 행위가 드러날 때마다 강하게 항의하고 해명을 요구하는 외국과 달리, 1970년대부터 “정확한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란 신중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번에도 도청 내용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며 “사실관계 파악이 가장 우선”이라며 파문을 줄이려 했다. 이러한 저자세는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와 오는 26일 한미 정상회담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안방을 도청당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뉴욕타임스는 1977년 미국 정부의 청와대 도청 기법을 폭로했었다. 그 이후 정부 기관은 물론 대기업 중에도 유리창에 도청 방지 특수필름을 바르는 곳이 많아졌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진동과 파장을 분석해서 멀리서도 실내 대화를 엿듣는 기법이 사용됐기 때문이다. 박원순 시장 시절 서울시도 시장 집무실 창문에 도청 방지 필름을 입혔다. 유리창의 떨림 분석에 이어 전구의 진동 분석을 통한 도청 기술도 나왔다. 2020년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 연구진은 천장에 매달린 전구 표면의 미세한 진동과 기압차를 분석해 방안에서 나오는 음성과 음악을 창 밖 25m 정도 거리에서 분리, 재생하는 데 성공했다. 스마트폰 도청 기술 중에서는 이스라엘 기업 NSO그룹이 2010년 개발한 페가수스 프로그램이 유명하다. 2021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아이폰과 페드로산체스 스페인 총리의 스마트폰을 각각 해킹한 프로그램이 페가수스였다. 미 연방수사국(FBI)도 2019년 비밀리에 구입할 만큼 강력한 도청 프로그램으로 평가받고 있다. 페가수스는 아이폰과 안드로이드폰의 암호화된 통신을 완벽하게 풀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일반인들도 마음만 먹으면 도청 장비 혹은 도청 방지 장비를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아마존이나 쿠팡 같은 인터넷 쇼핑몰에는 동전 크기만한 초소형 녹음기부터 만년필, 손목시계, 안경 타입의 스파이카메라 등 도청 장비가 넘쳐난다. 몰래카메라와 도청 장비를 색출하는 장비들도 흔하다. 스마트폰에도 도청에 악용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들도 많다. 어린 자녀가 무사히 귀가하고 있는지 궁금한 부모들이 주로 설치하는 ‘내 자녀 찾기(Find my kids)’류의 앱들이 대표적이다. 위치 추적은 물론 실시간 통화 내용 듣기가 가능한 이런 앱은 상대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불법 도청에 악용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국가간의 도청은 오래된 비밀이 되었고, 개인 간의 도청 또한 일상이 된 세상이 되었다.


    정보 전쟁에는 영원한 우방도 동맹도 없다. 사실 미국만 감청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정보 동일체인 이른바 ‘파이브 아이스’ 국가들은 전 세계를 감청한다. 이 감청 대상에 동맹국이라고 빠지지 않는다.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등 안보에 민감한 국가들 모두가 다른 나라를 감청한다. 문재인 민주당 정권 때도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우리 정부 감청을 당연히 시도했을 것이다. 북한과 맞닿아 있고 주변 강국들과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은 대표적인 정보 전쟁터다. 미국의 동맹이면서도 정권에 따라 대미·대북 정책이 급변하기 때문에 각국 정보기관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는 안보 문제로서 정보기관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감청하는 정치적 비리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런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도청은 알고도 넘어가는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 국제 정치의 현실이기에, 도덕적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다. 하지만 불법 도청 활동이 확인된 이상 한국은 우선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야 한다. 동시에 항상 감청을 당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주변 감식에 대한 역량을 강화하고, 만약을 대비해 상대를 감청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야 한다.
 

저작권자 © 주간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