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내게 배우라!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장 29절>
언젠가 어린 아이가 오래 만에 엄마와 같이 교회에 왔어요. 제가 반가워서 이렇게 물었지요.
“이름이 뭐지?”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했지요.
 “김지우야.”
 그러니까 아이 엄마가 깜짝 놀라며 ‘김지우야가 뭐야, 김지우입니다, 해야지.’하는 겁니다. 제가 눈치를 채고 고쳐서 물었지요.
 “이름이 뭐지요?”
 “김지우예요.”
이제야 엄마 생각대로 대답이 제대로 나온 겁니다. 제가 질문을 잘못한 거지요. 그래서 또 배워요.
“심은 대로 거둔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라.”
여기서 배운다는 것은 제자로서 배운다는 뜻입니다. 머리로만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삶으로 배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무얼 배운다는 것은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르는 것을 배울 때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가 배우는 것들은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요. 성경말씀도 모르는 것을 배울 때가 있지요. 둘째는 아는 것인데 다시 확인하며 배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잘해야지요. 셋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함으로 삶으로 익혀서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이미 알고 있던 말씀들을 다시 확인하며 또 몸으로 실천하며 배운 진리들이 있지요.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십자가를 결정해 버리셨지요. 십자가는 십자가 앞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지요. 기도 시간에 결정하는 것이란 사실을 다시 확인하며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배웠지요. 주님이 십자가에 위에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몰라서 저럽니다.’는 말씀은 다 아는 말씀인데 다시 확인하면서 배웠지요. 다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주님의 멍에인 십자가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는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면 배우는 비결이 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잘 배우고 주님의 뜻대로 배운다면 ‘말씀으로 나를 고쳐 가면서 배우는 일’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그는 아들을 주신다고 했지만 세월이 가는데도 소식이 없자 충성스런 종을 양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손이라고 하시니까, 자기 생각을 고쳤지요. 내 생각이 있어도 말씀으로 그 생각을 고쳐갈 줄 아는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이지요. 또 더 깊이 더 자세히 배우는 비결은 의심과 갈등이 올라 올 때마다 질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면 하나님의 답이 나오는데요. 하나님도 중요한 일을 해결할 때에 질문으로 해결하셨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모세야, 네 손에 있는 게 무엇이냐?”
주님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음에 번민이 들어오고 갈등이 생길 때, 기도로 질문할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배우라고 하신 말씀은 모델이 중요함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모델이 되시니 틀림없는 것이지요. 만약 모델이 잘못되면? 배우지 말아야지요. 요즘 이단에게 배웠다가는 자기 영혼을 망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제자로서 잘 배울 것입니다. 예배드리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을 자세히 배워서 평안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배움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십자가이지요. 제자로서 자세히 깊이 배우는 자들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할 것이며 주께서 책임져 주시는 축복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

그는 경남 하동이 고향입니다. 그럭저럭 행복하던 가정입니다. 부인이 우유 대리점을 해 보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 됐습니다. 부인은 남편 몰래 사채에 손을 댔고 걷잡을 수 없이 빚을 키우고 말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대출을 받았지만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마침내 월급과 퇴직금에 차압이 들어왔습니다. 애기 엄마는 미안하다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늘 주눅 들어 있었습니다. 집 안은 온통 어두움 투성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모든 것들을 처분하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 손에 남은 돈은 달랑 800만원, 지하 단칸방에 몸을 풀었습니다. 아침이면 눈 뜨는 게 두려웠습니다. 환한 대낮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비롭게도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음성이 확 올라왔습니다.
‘어차피 죽을 거, 애비로서 한 번 최선을 다해 봐라.’
신기한 노릇입니다. 이런 생각이 자신을 사로잡기 시작하니까 한 번 해 보자는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나는 아버지다. 내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
다행이 큰 아들이 공부를 웬만큼 했습니다. 자신은 노동판에 뛰어 들었습니다. 담배도 끊고, 죽어라고 일했습니다. 페인트공, 택시 운전 등, 피눈물 같은 10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부인도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나에게 체면과 부끄러움은 사치다. 과거의 나를 버려라.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
지금도 그는 막 노동일을 하고 부인은 식당에서 일합니다. 그러나 떳떳합니다. 큰 아들은 사법 시험에 합격했고 막내는 아르바이트로 성실합니다. 드디어 몇 달 전, 좁지만 세 칸짜리 셋방을 구했습니다. 10년 만에 가족 모두가 모여 함께 식사도 했는데 이게 얼마만의 일인지, 얼마만의 행복인지, 목구멍을 타고 뜨거움이 올라왔습니다. 부인은 눈물로 밥을 비벼 먹었습니다. 아이들도 우느라고 밥을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 울자, 오늘까지만 울자. 우리는 울 자격이 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을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껍데기뿐인 희망이라도 가져야 그 걸로 일어설 수 있다.”
  내가 오늘 내 안에 들어오도록 허락할 것은 무엇이고 거절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낙심도 어두움도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말고 거절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붙잡아야지요. 그건 내 선택의 자유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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