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4일 오후 미국에 도착해 5박7일 간의 국빈 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윤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는 이날 오후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 편으로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안착, 미리 영접 나온 인사들을 만났다. 미국 측에서는 루퍼스 기포드 국무부 의전장, 필립 골드버그 주한미국대사, 커트 캠벨 미국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 대니얼 크리튼브링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에드가드 케이건 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 보좌관, 브라이언 보벡 89정비전대장 등이 윤 대통령 부부를 맞이했다. 우리 측은 조현동 주미대사, 이승배 워싱턴지구한인연합회장, 박요한 민주평통 미주부의장대행, 김선화 한국학교워싱턴지역협의회장 등이 참석했다. 레드 카펫 끝에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미군 의장대도 도열했다. 윤 대통령 부부는 6분가량의 도착 행사가 끝난 뒤 준비된 차량을 타고 앤드루스 공군기지를 떠나 영빈관인 블레어하우스로 이동해 여장을 풀고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다한 미국 측의 환영 행사는 감사하지만, 윤 대통령이 미국과 풀어야 할 과제는 산더미이다. 이번 회담에 대해 국민들은 기대보다 걱정이 큰 게 사실이다. 미국은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무리한 경제적 요구를 하고 있는데, 대통령실은 기대 수준을 낮추려는 듯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이나 반도체 지원법이 이번 회담 주요 의제가 아니라고 하는 등 경제 분야는 미리 포기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는 경제현안이다.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바이오 등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협력하고, 미국 첨단기업의 한국 투자유치와 한국 기업 대미 수출확대, 한국수력원자력과 미 웨스팅하우스간 지식재산권 분쟁해결 등으로 한국 원전수출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방문일정 동안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미국과 중국과의 심각한 냉전 관계에서 한국 기업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반도체와 관련해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은 지난해 10월 중국에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을 금지했고,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회사들이 보조금을 받으려면 중국 내 생산을 10년간 5% 이상 확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중국 공장은 첨단 반도체 제조 장비 판매 금지 대상에서 올해 10월까지만 유예를 받은 상황이다. 이로인해 SK 하이닉스는 2020년에 90억 달러를 들여 인텔의 다롄공장 등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인수했는데, 10월 이후에는 이곳에 첨단 장비를 들여놓지 못하는 것이다. 또 미국은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접근 허용과 회계자료 제출 등 기술과 영업비밀 공개를 보조금 지원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대통령실은 명확한 근거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우리 기업에 그렇게 피해가 크지 않은 방향으로 운영돼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회담 주요 의제로 포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이 미국 최대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에 수입금지 등 규제 조치를 취할 경우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그 공백을 메우지 않도록 해줄 것을 조 바이든 정부가 한국 측에 요청했다. 삼성전자, SK 하이닉스가 마이크론 대신 반도체를 중국에 추가 공급한다면, 중국은 자국 산업이 받을 피해에 대한 부담 없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이 같은 보도에 대해 미 백악관과 한국 대통령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지난달 말 중국의 국가사이버정보판공실은 “마이크론의 중국 판매 제품에 대해 안보 심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 정부는 이런 조치가 미국의 대중 수출통제 강화에 보복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사전작업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한발 더 나아가 마이크론 반도체의 수입을 통제할 경우 미국은 대응 수단이 마땅치 않다. D램 세계 3위 마이크론의 제품이 없어도 중국은 1, 2위인 삼성전자, SK 하이닉스에서 반도체 구입을 늘려 충격을 피할 수 있다. 매출 4분의 1을 중국, 홍콩에 의지하는 마이크론만 타격을 받게 된다. 한국에 대한 미국 정부의 요청은 마이크론의 수출 감소분을 한국 기업이 벌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보복에 제동을 걸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문제는 대중 수출 급감, 반도체 가격 하락으로 막대한 적자를 내고 있는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기 대단히 어렵다는 점이다. 올해 2분기 삼성전자는 15년 만의 분기 적자를 낼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반도체 부진으로 인해 한국 경제는 무역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요청에 응할 경우 중국 공장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직간접적 압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다. 또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양쯔메모리(YMTC) 등의 기술 첨단화의 속도만 높여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 해도 미국이 자국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 기업의 희생을 요구하는 건 과한 일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수십조 원을 미국에 투자해 공장까지 세우고 있다. 이 사안이 한미 정상회담 의제에 오른다면, 중국의 반도체 자립만 재촉할 가능성 등 미국 측 요구의 문제점을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한국의 국익을 당당하게 관철시켜야 한다. 미중 간의 갈등으로 인한 비용을 한국 기업이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미국 반도체법·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관련해 한국 기업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뿐 아니라 대중국 반도체 규제 강화에 동참하라는 미국의 압박에도 구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가식적으로 한미 동맹만 반복적으로 외칠 것이 아니라, 미국의 지나친 시장개입에 대해 할 말은 해야 한다.‘우리가 미국에 이만큼 협조하고 투자해 줬으니, 미국도 성의를 보이라’는 압박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윤 대통령의 방문이 재외동포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킨 회담으로 기록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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