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6월은 미국에서 가장 들떠 있는 졸업 시즌이다. 특히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에서는 고교 졸업생의 90% 이상이 대학교에 입학하거나 아니면 대학을 목표로 재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래서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졸업식에 참석을 안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미국의 사정은 다르다. 졸업생의 절반은 자기가 원하는 일과 목표를 향해 대학을 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위축되지도 않는다. 이처럼 미국의 고교 졸업식은 졸업생들에게 새 출발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학교 졸업식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 인생에서 가장 큰 파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년동안 덴버에서 현장취재를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식에 여러 번 참석했었다. 늘 남의 졸업식에 가서 구경만하다가 지난해 큰아들 졸업식에 참석하면서 멀리서 바라보았던 고교 졸업식의 감동은 배가 되었다. 식이 시작되면서 졸업생 이름이 한명한명씩 호명될 때마다 가족들과 참석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고, 스타디움은 환호성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그날만은 모든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아이들이 어떤 대학에 가든, 가지 않든, 어떤 학점을 받았든 상관없이 그들이 보낸 4년을 칭찬했다. 졸업식 이후 주말 내내 이어진 졸업파티는 졸업식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행사들을 접하면서 부모의 욕심은 아이들의 행복과 관련 없음도 통감했다. 


    23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였다. 시애틀의 한 마켓에서 장을 보는데 카트에 앉아 떼를 쓰고 있는 아이를 본 적이 있다. 아이는 카트 앞쪽에 있는 차일드 시트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물건을 넣는 자리에 앉아서 발을 동동 구르거나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 광경을 지켜본 필자는 ‘부모는 왜 가만히 두고만 보지? 한대 쥐어박든지, 부모가 저렇게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으니까 애들이 제 멋대로인 거야. 나는 절대 저렇게 키우지 말아야지’ 하면서 그 미국 부모의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막상 아이들을 낳아 키워보니, 당시 그 부모의 무력함을 탓했던 필자가 오만했음을 자주 깨닫게 되었다.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이었다. 미국은 알다시피 가을에 첫학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8월 말경에 첫 등교를 한다. 그때도 아침부터 숨이 막히는 콜로라도의 여름 날씨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고 아끼는 털부츠를 꺼내왔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발을 신고 첫 등굣길에 오르고 싶었던 아들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부츠부터 신고 문 앞에 서 있었다. 간신히 부츠를 벗기고 바지는 입혔지만, 좀처럼 부츠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입학식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들은 엄마의 공갈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지금은 여름이라 털부츠를 신고가면 선생님들이 싫어한다, 너를 이상한 아이로 본다 등의 말로 아무리 그를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는 필자의 몫이었고, 아들은 반팔 티셔츠, 시원한 샌달을 신은 아이들 틈에서 털부츠를 신고 초등학교 입학식을 치렀다. 아들의 콧등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신고 온 털부츠의 선택을 매우 만족해했다.


    최근에도 필자는 부모의 강압으로 아이가 행복해지는 확률은 매우 낮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고등학교 시니어들은 보통 5월 이전에 진학할 대학을 결정해야 한다. 큰아들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들은 학교 성적이 월등히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다. 4년 동안 지각으로 인해 결석 통보 전화도 자주 받았고, 숙제를 빠트리거나 늦게 제출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다 대학도 못 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운 좋게도 지원한 대학 몇 개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그러나 아들은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부모가 원하는 학교와 아들이 가고 싶은 학교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등록마감 일주일 앞, 더이상 결정을 늦출 수 없을 때 아들은 합격한 학교들의 장단점을 비교분석한 도표를 우리의 이메일로 보내왔다. 결국 이때도 포기는 나의 몫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선택한 학교로 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기숙사에 내려놓고 올 때도, 방학 때 집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데려다 줄 때도, 부모의 마음은 본인이 원하는 학교로 가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아들의 고집을 꺾기 위해 허비했던 두어달의 시간을 후회함과 동시에, 아들이 원했던 학교를 보낸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면서 안도의 숨을 내쉬곤 한다. 


    올해도 한인 2세들은 미국의 우수한 대학들에 앞다투어 진학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졸업생 대표인 발레딕토리안에도 선발되었다. 한인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청소년을 응원하는 한인 청소년 문화재단의 대표자로서 여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수한 아이들도 많지만 주변에는 평범한 아이들이 훨씬 많다. 고등학교의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지금 당장 유명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주눅들 필요는 없다. 지금 꿈을 정하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발견하지 못한 재능은 곧 발견될 것이다. 또, 서울대학교를 떨어지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사업에 뛰어든 지인은 지금 재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또 다른 친구는 가기 싫었던 불어과에 진학했다가 졸업 전에 외무고시를 쳤고 자신이 원했던 외교관이 되었다. 필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신문방송학과에 가게 될 줄 몰랐다. 이렇다 보니 지금 당장 일등이 아닌 아이들의 미래가 더욱 궁금해진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것이다. 잘했건 못했건 졸업하는 모두가 대견하다.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4년을 버텼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배운 것은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들의 선택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다려 주는 일만 남았다. 그들의 찬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렬히 응원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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