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장로교회 김병수 담임목사

    최근에 한 세미나를 참석했습니다. '커피 브레이크' 라는 교재를 가지고 성경 공부를 하는 분들을 위한 세미나였습니다. 여러 워크 샵과 강의가 있었는데 그 중에 제게 큰 도움이 됐던 한 강의의 내용을 좀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강의 중에 여러 내용들이 많았지만 제게 가장 와 닿은 말은 '상대방 중심의 대화'였습니다. 강의를 듣고 보니 제가 일평생 동안 해왔던 대화 방식은 '나 중심적인 대화'였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상대방에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이 항상 저의 대화의 목표였던 것 같습니다. 때로는 설득으로, 때로는 논리로, 때로는 주장으로 일관했던 모든 대화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중심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우리의 대화와 인간 관계에는 부딪힘과 아픔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강의를 맡았던 강사님의 딸과 손주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이랬습니다. 갓 태어난 여동생 때문에 모든 사랑과 관심을 빼앗겨 버린 오빠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큰아이는 자기가 받던 모든 사랑을 동생이 독차지해 버리자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받은 것입니다. 큰아이가 소리를 지를 때 엄마는 "너 엄마가 동생 때문에 힘든 것 알지? 엄마가 지금 이렇게 힘든데 너까지 왜 이러니?"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니? 엄마가 허그해 주기를 원해?"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엄마가 큰 아이를 안아주고 나서는 "다음번에 또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는 '엄마 나 허그가 필요해요.' 라고 말하면 된다”고 일러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매번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싶을 때 "엄마 나 허그가 필요해요."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이 아이의 행동과 마음을 바꾼 걸까요? 엄마가 이 아이에게 자기중심적으로 대화하지 않고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상대방 중심'의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통해 배운 두번째 대화 방법입니다. 학교에 갔다 와서 뾰로통하게 화가 난 체로 엄마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고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는 딸과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너 감히 엄마에게 하는 말투가 지금 뭐니? 당장 방에서 안 나와!" 라고 소리친다면 엄마와 딸은 며칠 동안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 착한 아이가 오늘 많이 힘들었구나?" "우리 착한 아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예쁜 미소가 보이지 않는 걸까?" 라고 하면서 자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상대방 중심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엄마의 말을 듣게 될 때 아이도 마음을 열고 좋은 대화를 시도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대화법들은 듣기에는 너무나 좋아 보이지만 사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면 머리는 하얘지고 좋은 대화들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화부터 납니다. 우리 마음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대화를 시도하는 어른들을 제대로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훈련해야 하는 것은 마음의 저수지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강사님은 '양동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저는 '저수지'라는 말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저수지는 물이 모일 때 둑이 범람하지 않도록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우리를 화나게 하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듣습니다. 우리 마음의 저수지가 적다면 그런 말들로 인해 우리 마음의 저수지는 금방 무너지고 터져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저수지가 크다면 화나는 말을 듣더라도 소화를 시키면서 천천히 물을 흘려 보내게 될 것입니다. 화나는 말을 들었을 때 금방 화내지 않고 그런 말을 한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좋은 대화를 시도하다 보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마음의 저수지를 무너뜨리지 않고 천천히 물을 흘려 보내면서 사람을 살리는 대화를 해나갈 수 있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을 하는 저도 마음의 저수지가 터져서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물폭탄으로, 언어의 폭탄으로 덮어버린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다시 한번 나 중심의 대화가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대화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대화 방법도 '나 중심의 대화' 아니라 '상대방 중심의 대화'를 하실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나 중심의 대화'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분입니다. 그분 자신이 진리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늘 죄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대화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제자들이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나면서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맹인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이 사람의 관점에서 그리고 맹인을 치유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대답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맹인이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도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 모든 사람이 맹인이며, 예수님의 치유가 필요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라도 이와같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넓은 마음의 저수지를 가지고 ‘상대방 중심’의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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