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편지 / 한용구 목사

◈ “네 마음을 지키라” 잠언 4장 20절~27절 

제가 신기하게도 65년 전, 5살 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1950년대 후반 우리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할 때, 그때 어린 꼬마들에게 로망은 세발자전거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 집은 살만했어요. 아버님이 대전사범학교 교사였거든요. 어느날, 아버님이 세발자전거를 사 오셨어요.   으와, 이걸 타고 동네방네 다 돌아다녔어요. 신났지요.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요. 이렇게 귀한 세발자전거에 눈독 들인 사람이 있다는 걸 몰랐어요. 엿장수 아저씨요. 절컥 절컥, 엿사세요. 너무 맛있어서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대요.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제 앞에서 엿을 찌익 늘이면서, 어때? 먹고 싶지? 이게 얼마나 달콤한지 아니? 제 눈이 돌아갔어요. 결국 5살짜리는 당장 좋은 것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어요. 엿 두 가닥하고 꼬마들의 로망이었던 세발자전거를 홀랑 바꿔 먹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종종 아버님으로부터 골림을 당했어요. “엿하고 세발자전거 바꿔 먹은 놈.”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 세발 자전거가 생각나면서 공식 하나가 떠오릅니다. 그 공식은 뭔가를 뺏기는 공식입니다.
  1- 저는 먼저 눈과 귀를 뺏겼어요. 엿장수 아저씨가 보여주는 엿을 자꾸 쳐다보니 먹고 죽어도 좋겠다는 착각 속에 빠진 거지요. 눈과 귀를 뺏기고, 그 다음엔 마음까지 뺏겨 버렸어요. 그리고 얼마나 허무한지.  그리고 생각합니다.  “뺏겼다는 것과 드린다는 것의 차이는 뭘까?”
뺏겼다는 것은 그 마지막이 허무해요. 내가 나에게 멈춰, 그만해도 말을 안들어요.  
  2-뭘 드린다는 것은? 흐뭇해요. 예배드린 후에 영적인 만족을 느끼는 것이지요.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렇습니다. 마음 지키지 않으면 생명을 잃어 요.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세발자전거가 날아가요. 그리고 허무함을 느껴요. 에덴 동산에서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귀를 뺏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뺏지요. 결국 그 영혼을 뺏기고 말지요. 사울왕은 참 착하고 잘 생긴 왕이었지요. 그런데 그만 여인들의 노래 소리에 귀를 뺏기고 눈을 뺏기고 마음까지 뺏겨서 평생 다윗을 미워하다가 생을 마감하지요.


  전문가들은 조심해야할 감정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첫째가 분노입니다. 화를 내는 순간 내 명예, 내 판단, 내 자존심 등등을 뺏기는 거지요. 분노하면 내 입이 사나워집니다. 결국 내 입에서 사나운 말이 나가는 순간, 내 마음을 뺏기게 되지요. 욱하고 올라오는 감정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마음을 지키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지요. 둘째가 헛된 욕심입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마음을 뺏기면 인생은 어두워질 수 밖에 없지요. 말씀으로 내 욕심을 다스려야지요. 셋째는 내 분깃을 사랑하고 내 분수를 지키는 일입니다. 절대로 비교하지 말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 있어요. 그 길을 가면 되는데요. 다른 인생을 힐끔거리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내 분깃을 사랑하고 성실을 다하는 것이야 말로 위대한 일이니까요. 내 눈과 귀를 지키고 내 입을 지키며 내 마음을 지키는 비결은 결국 말씀으로 파수꾼을 세우는 일이지요. 말씀의 불을 켤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말씀 앞에 나를 복종시킬 수 있다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말씀을 훈련해야지요.  평생 기도 제목입니다.  “주님, 말씀의 불을 켜고 내 눈과 귀를 관리하게 하소서. 내 입을 말씀으로 다스려가게 하소서. 내 마음에 말씀의 불을 켜는 훈련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행복 비타민을 먹고 먹이자!!

 아직 말도 못하는 꼬마들이지만 기가 막히게 알아듣는 말이 있습니다. 금방 얼굴이 환해지지요.
 “너 참 예쁘다.”
 “너 참 잘 했다.”
  왜냐하면 이건 행복 비타민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어떤 아이들이 흰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엄마와 아빠가 볼 일을 보고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에 무료하니까 아무렇게나 그림을 그립니다.  어떻게 보면 개발 새발 그려 놓은 낙서 같은 그림입니다. 그때 피카소가 그려 놓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외칩니다.
“으와! 너 참 잘 그렸다. 굉장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진심으로 칭찬하는 일입니다. 그 아이 수준에서 그 그림은 최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또 다른 종이에 개발 새발 그려서 제 코 앞에 들이댑니다. 또 ‘참 잘 그렸다.’라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건 들어도 듣고 싶은 말입니다. 말도 못하면서 희한하게 알아듣습니다. 어떤 꼬마가 새 신발을 신고 왔습니다. 저는 또 호들갑을 떱니다.
“으와!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신발이 어디서 났니? 그냥 날아갈 것 같은 신발이구나!”
 저는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더 팔랑팔랑 뛰어 갑니다. 뛰어가는 모습이 전혀 다릅니다. 어느 때 엄마가 신발을 신겨 주기만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때 이렇게 호들갑을 떱니다.
 “으와, 이렇게 멋진 신발이 니꺼란 말이야! 으와! 한 번 신어 볼래?”
 그러면 엄마가 신겨줄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고물거리는 자기 손으로 신발을 신습니다. 그리고 궁뎅이를 이리 저리 흔들면서 잘도 걸어 다닙니다. 행복 비타민이 그렇게 좋은 가 봅니다. 어른들은 행복 비타민이 필요 없을까요? 언젠가 저희 집 아이가 말합니다.
“아빠, 이번 주 칼럼 읽고 눈물이 나왔어.”
 “그래?”
  조금은 쑥스러웠지만 캬, 제 입속으로 행복 비타민이 한 움큼이 들어갔습니다. 힘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내가 버섯 찌개를 끓였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보챕니다. 행복 비타민 먹여 달라고!
 “어때? 맛있지요? 식당에서 사 먹는 것 보다 훨씬 낫지요? 만 원 자리는 될 걸?”
  그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국물이 울컥 역류하면서 콧구멍을 찔렀습니다. 그래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니 한마디 더 합니다.
 “만 원 짜리가 뭐냐? 오 만 원도 더 되겠다!”
  이번엔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이게 행복 비타민이라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가 ‘나를 위로하는 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 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게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을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가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혼자 중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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