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선교교회 김교철 담임목사

    왜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실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흔히 십자가의 종교 또는 사랑의 종교라고 호칭하는데 하나더 추가하자면 기독교는 부름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구원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아무나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라는 말씀처럼 누군가 그 사람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해 주었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불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 하시도다”


    신문 지상에 간혹 대통령이 모범 시민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다과나 칼국수를 같이 하였다는 기사를 접하게 될 때 있는데 그 사람은 그만한 자격이 있고 그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대통령을 만나 뵙는 영광의 자리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은 그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스러운 일이면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큼 무슨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일방적으로 부르셨을 때 아브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무슨 업적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여호수아가 말씀합니다.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라는 말씀처럼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때였습니다. 오늘날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으면 세상에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목사, 장로, 집사는 그만두고서라도 구원조차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금 예수를 믿고 성도가 되고 집사, 장로, 목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나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고 알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이 불러 주셨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첫 출발은 아브람에게는 어떤 티끌만 한 공로가 있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비록 내가 하나님앞에서 무슨 잘한 일이 없어도 하나님이 정말 나같은 자를 불러 주셨을까? 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뒤늦게 사도가 되었지만 어느 사도보다 많이 충성하고 목숨을 걸면서 주의 일을 할 수 있게 된 충성심의 동기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었는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의 과거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시고 자신을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같은 고백은 사도 바울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는 말씀처럼 저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가 받아야만 할 말씀인 것입니다. 부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나였는데 불러주신 것을 생각하면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주님이 피흘려 값주고 사신 교회를 달 받들어 충성하고, 주님의 복음 전도와 선교에 시간과 물질을 바쳐 헌신해도 아까와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우상을 믿는 가문에서 불러 내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이용하여 무슨 유익을 취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는 말씀과 같이 한 마디로 아브람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복'이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며 받기 원하는 것이며 받을수록 좋은 것이 복이기에 어느 누구도 복을 거절할 사람이나 복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흔히 신앙의 목적이 복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기복주의를 비난하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복 받기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주신 기업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첫째는 토지기업, 생명기업, 관계기업을 주심으로 이것이 상실된 것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 땅(토지)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배를 회복할 때 토지, 생명, 관계기업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예배회복을 통해 땅이 회복됐으며, 지금 우리까지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므로 지금까지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모쪼록 우리 콜로라도 도민들께서 예배를 회복함으로 영원한 복을 누리는 가정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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