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개봉한 한국 영화 중에 <즐거운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준익 감독의 음악 영화인데, 일주일 앞서 개봉한 영화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내용이 거의 비슷한 것 때문에 논란이 일어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 영화를 보면서 진한 공감대를 형성했었다. 다소 뻔한 이야기이지만, 흥겨운 음악과 기러기 아빠라는 현실적 소재를 잘 살린 훈훈한 작품이었다.

    <즐거운 인생>은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바라던 남자들이 평범한 삶을 살다 우연히 재회하게 되면서, 삶의 열정을 다시 찾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정확히 이십 년 전, 대학가요제에서 3번의 탈락의 고배를 마신 록밴드 활화산. 그들은 이후 밴드를 해체했고, 음악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한 친구는 명예퇴직 후 집에서 눈치를 보며 살고 있고, 한 친구는 자식을 위해 택배 일과 대리운전 일로 하루하루가 고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친구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자식과 부인의 유학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세 남자는 우연히 활화산의 리더 친구의 장례식에서 재회한다. 삶에 찌들어 살던 그들은 삶의 열정을 되찾고자, 이십 년 전 자신들의 희망이었던 활화산을 재결성해 음악인으로서 살기를 꿈꾼다. 그러나 그들의 실력은 이미 예전 같지 않다. 현실에서 그들을 인정해주는 곳은 어디도 없다. 가족들도 그들의 밴드 결성을 못마땅해한다. 급기야 기러기 아빠는 이혼을 요구당하고, 바쁘게 밤낮으로 일했던 친구의 아내 역시 집을 나가는 등 수난이 계속된다. 하지만, 그들은 끈기 있게 공연 준비를 하고 마침내 공연에 성공한다. 기러기 아빠는 이혼의 아픔을 공연의 벅찬 감동으로 회복하고, 집을 나간 친구의 아내는 공연장을 찾아 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젊고 발랄한 영화배우들이 주인공이 아닌 탓에 시각적인 즐거움은 덜하다. 하지만 삶에 찌든 중년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쳐서 신선했던다. 다소 지루했던 필자의 삶에 뭔가를 저지르게 하는 용기를 갖게한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필자가 미국에 온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다. 제각각 힘들어했던 소재는 달랐지만, 필자의 모습도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잘 먹고 잘 살려고 이민을 왔고, 이곳을 선택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국에서 산다면 으레 ‘아주 잘산다’고 짐작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세탁소나 리커스토어 혹은 식당에서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아이들을 픽업해서 하루는 피아노, 하루는 태권도, 또 하루는 학원에 데려다 준다. 그리고는 밤이 늦어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와 곧바로 잠자리에 들기 바쁘다. 우리의 대부분은 이렇게 20여 년을 넘게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다. 뒤돌아볼 새도 없이 달려온 덕분에 아이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무사히 졸업했지만 정작 본인은 허탈하고 외롭다. 잘 살기 위해 선택했던 길인데, 최근 들어 자꾸 기운이 빠지면서 그다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래서 2주 전 용기를 내어 스페인으로 떠났다. 대학시절 유럽 배낭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스페인만 둘러보지 못했던 아쉬움이 내내 마음 한켠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여행은 필자의 버킷리스트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는 여정 중의 하나였다. 신문이 휴간이었기도 했고, 둘째 아들이 올해부터 혼자 운전을 시작할 수 있게 되면서 학교 픽업과 드랍도, 학원에 데려다주지도 않아도 되니 필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자유의 시간은 없었다. 출발 전날 꼬리곰탕과 씨레기 된장국 등 몇 가지의 국과 반찬을 냉장고에 챙겨두었다. 그리고 남편과 아들에게 부족한 것은 알아서들 사 먹으라는 엄포 아닌 엄포를 놓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앉자마자 자유의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함이었다. 스페인은 30년 동안 꿈꿔왔던 필자의 상상 속의 모습보다 훨씬 멋졌다. 전세계에 걸쳐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 그 빛났던 역사는 전세계인을 스페인으로 이끌기에 충분할 정도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골목 한 귀퉁이에 서서 스냅 사진을 찍어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이 연출되는 듯, 도시마다 어마어마한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열흘을 보내고 돌아온 덴버공항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집에 도착해 여행 전과 다름없이 저녁을 준비했다. 추운 날씨를 감안해 어묵탕을 끓이기로 했다. 냄비를 꺼내고, 재료를 준비하는 필자의 손놀림이 무척 가벼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확실히 예전과 다른 일상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최근에 남편을 보면서 중년의 즐거움을 새롭게 발견하기도 했다. 필자와는 달리 남편은 밖에 나가는 것보다 집에서 혼자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명 집돌이다. 그런데 간이식을 하고 난 이후에는 남편이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 가는 듯했다. 그때 물었다. “게임이 그렇게 좋냐”고 말이다. 그의 대답은 “좋다”라고 했다. 아무 생각없이 앉아 게임을 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그렇지만 게임을 마치고 나면 피곤한 모습이 역력했다. 수술한 지 6년이 지났다. 건강을 되찾자 남편은 테니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은 격한 운동은 피해야 했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에 만족해야 했지만, 완치판정을 받자 젊은시절 잠깐 들었던 테니스 라켓에 자꾸 손이 간다는 얘기를 꺼냈다. 지금은 테니스 치는 날만 되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서인지 일에도 능률이 올라 보인다. 물론 테니스를 처음 시작했던 날에는 마치 체력장을 끝낸 학생처럼 온 몸이 쑤시고 저리는 고통을 맛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해했다. 중년에 맞닥뜨린 또다른 도전을 온몸으로 즐기고 있는 듯했다. 53년 만에 그의 아름다운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마치 영화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교민 여러분들도 지난날에 대한 집착과 후회는 일단 접어두고, 지금부터라도 <즐거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해외여행이나 스포츠가 아니어도 좋다. 지금 당장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이라도 찾아서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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