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기독교회 송병일 목사

 이번 가족 휴가를 켈리포니아로 다녀오면서 오랜 시간을 운전을 했다. 가는 데 이틀, 오는 데 이틀 오고 가는 길에만 4일을 보냈다. 비행기로 갈 수도 있었지만 운전을 해서 가는 방법을 택했다. 차에 타고 있는 만큼은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차 안에서 특별한 가족간의 시간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같이 간식을 먹고, 음악을 듣기도 하고, 피곤하면 잠을 자기도 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기에 무슨 일을 하든지 서로가 다 알게 된다. 평상시에는 아이들과 같이 있는 시간이 아주 적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그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밥을 같이 먹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이제 둘째가 8월 말이면 대학을 간다. 벌써부터 자기는 주말마다 집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을 하기도 한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 그렇게 좋은가 보다. 이제는 필요한 것이 있어야 집에 올 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부모의 간섭과 규제에서 탈피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성장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너무 부모 곁에만 두려고 하는 것이 부모의 욕심일 수 있다.

    큰 아이를 대학에 보내면서부터 지금까지 8년이 지나는 동안 여행을 가족들이 같이 했던 시간 외에는 곁에 있어주지를 못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휴가 중에는 켈리포니아에서 큰 아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신학교에서 마지막 클래스를 들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풀타임 사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잠시도 비울 수 없었다. 그러기에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가기보다는 큰 아이와 함께 있는 것으로 모든 휴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꼭 어떤 일을 하기보다, 또 필요한 무엇을 주기보다는 곁에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곁에 있다’라는 말은 마음으로, 몸으로, 영혼으로 함께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아주 발달해 있다. 이메일은 벌써 오래전부터 편지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 사람에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보낼 수 있다. 생각한 것을 즉시로 써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을 얼마나 절약하는 지 모른다. 또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소통도 수월해졌다. 페이스북은 전세계 10억명 이상이 가입해 있는 거대한 사교 클럽과도 같다. 편지만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올릴 수 있다. 그러면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개발된 ‘카카오톡’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많다. 스마트폰만 있다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음성통화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이동 통신사들이 긴장하기도 했다. 분명히 과거보다는 수백, 수천마일 떨어져 사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아무 제한없이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와 교제들이 좋기는 해도 직접 곁에 있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점점 발달하는 기술때문에 우리 몸은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젊은 연인들이 커피샵에 같이 앉아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기보다는 스마트폰을 보기위해 머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결코 낯설은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는 말하고자 하는 내용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통은 내용보다 표정과 몸짓, 목소리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글자에는 감정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점도 물론 있다. 내용에 충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계는 깊어지지 않는다. 관계는 얼굴을 보고 감정을 서로 느낄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깨를 다둑이는 손길이나 따뜻한 포옹의 힘을 절대 얕보아서는 안 된다. 오래 전 ‘뉴욕 타임스’의 기자가 마릴린 먼로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자는 먼로가 얼마나 힘든 세월을 살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몇차례나 양부모가 바뀌면서 마음 고생이 아주 심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물었다. “양부모가 여러 번 바뀌었는데, 사랑받는다고 느낀 적이 있었나요?” 그러자 먼로가 이렇개 대답을 했다. “한 번 있었어요. 제가 일곱 살인가 여덟살 때였어요. 함께 사는 아주머니가 화장을 하는데, 제가 옆에서 쳐다보고 있었어요. 아주머니는 행복해 보였고, 그래서인지 볼연지로 제 얼굴을 톡톡 두드려줬어요. 그때 제가 사랑받는다고 느꼈어요” 그 아주머니는 그냥 장난 삼아 아무 의미 없이 어린 먼로의 볼을 두드려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곁이 있어 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했던 먼로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의 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단 한 번의 손길이 얼마나 강한 지 두고 두고 기억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줄 때 우리는 그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과 우리는 모든 경험을 나누고 싶어한다. 그래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하는 것이다.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고 깊은 고민을 털어 놓기도 한다. 결국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토대는 곁에 같이 있어주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곁에 있어주기의 실천은 결국 몸으로 곁에 있는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이번 휴가기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거의 15년 만에 만난 어느 노년의 부부와는 서로 식사를 하면서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 가정이 처음 교회를 시작했을 때 1년간 협력을 해주신 분들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헌신했고 우리도 그 분들을 신뢰하고 좋아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1년만 봉사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쉽기는 해도 1년 후에는 전에 다니셨던 교회로 돌아가셨다. 그 후로 가끔 보기는 했어도 지난 10여년간은 한 번도 만나거나 통화를 한 적도 없다. 서로가 전화번호 조차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아주 우연한 자리에서 그 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휴가에서 돌아오기 며칠 전 그 분들과 다시 만나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이제는 어느덧 70중반이 되셨지만 지난 일을 기억하시면서 해맑게 웃으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 받으면서 서로 연락을 하자고 했다. 몸으로 곁이 있어준 다음에는 시간과 힘을 쏟는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면 다시 인생을 함께 하는 추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같이 있어주는 기억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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